
유수 (流水)
계절 @season43121
부제-오얏꽃 피는 그날에
<읽기전 참고사항>
1. 역사적 고증은 틀릴 수 있습니다.
2. 내용상 나와야할 이화학당의 정확한 명칭은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입니다. 그러나 역사적 의미를 살리고 호칭에 대한 혼동을 막고자 '이화학당'이라고 쓴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3. 기울임체는 일본어, 그 외에는 한국어입니다.
4. 모바일에서 읽기 쉽도록 편집되었습니다.
한여진(22)
-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문학과(영문학)로 선과, 1933년 입학
황시목(26)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 1933년 3학년
#1
"자네 그거 들었나?"
물어보지도 않고 혼자서 답하는 일본인 출신 동기는 시목 앞에 놓여있는 빽빽한 법전을 읽는데 방해 밖에 되지 않는 존재였다.
"이 경성제국대학에 여자가 들어온다고!"
뭐라고? 주위에서는 한사람이 내뱉은 말에 모두가 발화자를 쳐다보며 강의실 전체가 술렁였다
"이화학당을 졸업해서 이번에 선과제도로 들어온다는데 공부를 꽤 잘하는 모양이야."
"얼굴 본적 있나?"
"어떻게 생겼는가, 곱상한가?"
민간대학설립운동 이후, 조선인에게도 고등교육의 기회를 주자는 취지로 설립된 이 경성제국대학. 그러나 조선은 보통교육도 받지 못한 사람이 대부분이었고, 그래서 생긴 게 바로 예과제도였다. 고등과정 3년을 예과로 2년, 즉 단기속성으로 배운 뒤 대학의 본과로 올라오는 특수한 제도였는데 이 와중에 남학생들이 예과를 마치고 일자리가 그나마 있는 법학과로 쏠림현상이 나타났다. 그래서 빈 문학과 자리를 채우려는 의도로 생긴 게 바로 선과 제도였다. 이번에 경성제국대학에 처음으로 들어온 여자는 선과제도 덕분에 경성제국대학 안으로 발을 붙일 수 있었다.
허울 좋게 조선인 교육은 무슨. 결국 대부분 일본인이지만.
"이봐! 안궁금한가봐? 내가 직접 봤는데..."
"별로."
시목은 간단히 일본어로 대답했다. 다른 동기는 언제 왔는지 시목의 옆자리를 꿰고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우리 과 수석이 그런 걸 궁금해 할 것 같나? 여자는 쳐다도보지 않는데 말이야. 각설하고 알려주시게."
"그니까 어떻게 생겼냐면..."
시목은 읽던 법전을 닫고 짐을 챙겨 나가려고 주변을 정리했다. 그리고 가방을 매고 강의실을 나섰다. 훈훈한 바람이 스치는 4월이었다.
#2
"잘 부탁드립니다."
시끄러운 게 그저 귀찮아서 나왔는데, 그 술렁이는 대화 속 주인공은 시목 앞에 서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시목에게 악수를 청하고 있었다.
"한여진이라고 합니다."
시목은 자신 앞에 놓인 손바닥이 굉장히 이질스럽게 다가왔다. 도서관에서 찾는 책이 있어 찾아갔는데 도서관 앞 문 앞을 지키고 있는 여자, 뿐이었다. 이 경성제국대학 안에서 여자가 있는 것도 이질스러운데 당당하게 악수까지 청한다니.
"네."
시목은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 앞에 있는 문을 다시 열었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저도 열어봤는데요."
시목은 뒤를 돌아 여진을 쳐다보았다. 시목은 절로 고개가 옆으로 기울었다. 모던보이 모던걸이 넘쳐나는 경성에서 그녀는 붉은 치마와 함께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이화학당 학생들이 입는 옷차림과 어이없다는 듯이 내뱉은 그녀의 목소리는 시목의 눈을 찡그리게 했다.
"휴무입니까?"
"그런가봅니다."
여진의 말투는 뭔가 딱딱하면서도 당당했다. 어디서도 기죽지 않는 모습으로 꼿꼿하게 서있는 모습이 얼핏 군인을 연상시켰다. 악수를 거절 받은 한손은 다른 손과 합세해 네모난 가방을 든 채로. 시목은 포기가 빠른 편이었다. 다음에 와야겠다는 생각 뒤에 바로 발걸음은 반대로 돌렸다. 여진은 자신을 신경 쓰지도 않은 채 모자를 눌러쓰며 구부정히 걸어가는 시목의 뒷모습만을 쳐다볼 뿐이었다.
#3
"조선어를 쓰는데도 지적을 안했다라..."
1933년, 한일병합조약 후 23년이 흐르고 일본은 그야말로 전쟁에 미쳐있었고 조선도 전쟁에 끼어들어가는게 아니냐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경성제국대학을 다니는 학생들은 기본적으로 재력이 있거나 친일파와 조금이라도 관련돼 있기에 이 어수선한 시국에도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정말? 진짜 조선어로 대답했어?"
여진은 한살 어린 동생 앞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그 잘나신 경성제국대학생께서 왜?"
"...모르지."
여진은 방에서 책을 펼치고 있었지만 글씨가 좀처럼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여진은 턱을 괴고 생각했다. 보통 좀 배운 '지식인'이라고 하면 일본어를 하며 유창하다고 유세를 떨겠지만 그 사람은 달랐다. 오히려 조선어를 쓰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여진의 말에 자연스럽게 조선어로 대답했다.
"설마."
여진은 방에서 같이 지내는 동생과 눈을 마주쳤다. 여진과 친동생은 아니지만 무척 가까운 동생은 여진의 눈에서 무언가를 읽었다.
"아니야. 신경 쓰지 마."
여진은 동생을 안심시키려는 듯 대답했다. 그리고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책을 덮고 책상위의 붉은 상자를 매만졌다. 동생이 졸린지 조용히 이부자리를 덮자 여진도 불을 껐다. 방은 순식간에 어두워졌지만 여진의 눈동자 속 빛은 쉬이 꺼지지 않았다.
#4
"이번에 새로 들어온 학생이다."
시목은 교양과목으로 영문수업을 듣고 있는 중이라 설마 예상은 했지만, 실제로 마주쳤던 그 여학생이 시목과 같은 강의실로 들어왔다. 영어권 교수가 진행하는 강의인지라 교수는 영어로 여진을 소개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영문과 한여진이라고 합니다."
강의실 내부를 가득 채우고 있는 남학생들은 술렁였다. 경성제국대학 최초의 여학생이라는 타이틀에 놀랐지만 더욱 놀라운 건 자기소개 할 때 나온 유창한 영어실력이었다. 교수도 놀란 눈치로 여진을 쳐다보았다. 시목도 어지간한 일에 놀란 적이 없지만 관심이 한번 가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여진은 꾸벅 인사를 하고 빈자리에 앉았다. 시목은 자신의 앞자리 쪽으로 오는 여진과 눈이 마주쳤다. 시목은 다시 자신의 책으로 눈을 돌렸고 여진은 그저 시목의 앞자리에 앉았다. 수업이 진행되고, 시목은 수업에 집중했다. 교수가 쓰는 필기 하나하나 전공서적에 쓰며 열중하고 있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 때 약간 집중력이 흐트러진 시목의 시선을 잡는 건 여진이었다. 여진의 오른쪽 팔꿈치와 옆구리 사이 삐쭉 튀어나온 무언가가 시목을 집중시켰다.
...총?
수업에 열중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녀였지만 그녀의 책 아래 종이 몇 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녀는 뭔가를 열심히 적는 듯 했지만 시목의 눈에는 대충 봐도 낙서하는 것이었다. 시목은 정확하게 무엇인지 보려고 여진의 책 아래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낙서가 적힌 종이를 보려다 시간이 지나 시목도 모르게 수업이 끝났다는 종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학생들이 짐을 챙기는 소리로 강의실은 요란했다. 시목은 문득 정신을 차리고 여진 때문에 적지 못했던 교수의 필기를 적고 있었는데 팔랑-소리가 들리며 자신의 옆쪽으로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한여진이라고 했던가?"
학생 몇몇이 여진 쪽으로 접근했다. 시목이 슬쩍 고개를 들어보니 의도는 뻔했다. 보니 일본인 2명에 조선인 1명이었다. 시목은 순간 오른쪽으로 몸을 숙여 떨어진 것을 주웠다. 그것이 종이라는 것도, 여진의 낙서라는 것도 줍고 나서야 알았다. 여진은 앉아서 그들을 올려다보았다. 보통 여자들과는 다르게 바라보는 눈빛에서 자신감과 꿰뚫어 보는듯한 느낌이 느껴졌다.
"반반하게 생겼네. 우리 저녁에 선술집이라도?"
"이곳 잘 모를 텐데, 우리가 잘 알려줄게."
그들은 히히덕거리면서 여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여학생 희롱으로 큰 시위가 나고 배운 점도 없는 건지 그들은 여진에게 거리낌 없이 희롱담긴 말을 걸었다. 시목은 대충 감으로 느껴졌다. 한여진 이라는 학생은 저런 희롱을 가만두고 넘어가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 시목은 계속 지켜보기로 했다. 뒤에도 구경꾼들이 꽤 있었다. 아마 남학생 무리들 중 몇몇이 이렇게 여진을 희롱해보자 하며 기세등등하게 나왔을 것이었다. 결국 여진은 참다못해 자신의 오른쪽 어깨 위 올려져 있던 손을 자신의 왼손으로 잡았다. 시목은 손을 내치기 위해 잡는 줄 알았지만 그 반대였다. 여진은 대답했다.
"이것 좀 놔주시죠."
그러나 남학생은 손을 어깨에서 뗄 수 없었다. 여진의 강한 악력으로 그 남학생의 손을 꽉 누르고 있었다. 잡는 악력이 보기에도 장난이 아니었다. 남학생의 손은 벌게지다 못해 얼굴도 벌게지고 있었다. 남학생이 아닌 여진의 힘이 우세였다.
"이..이년이?"
"놓아달라니까요?"
여진은 여유롭게 대답했다. 여진의 말투가 여유로워질수록 어깨 위의 손에 힘이 가해지고 있었다. 일본인 학생의 얼굴은 일그러져 가관이었고 옆에서 무슨 상황인지 감지한 학생 몇몇은 난감하지만 퍽 재밌어하며 입을 막으며 입 꼬리를 감추고 있었다. 결국 여진이 손에 힘을 풀며 남학생이 손을 빼냈고 그는 아픈 손을 흔들고 주무르며 여진을 내려 째려보았다. 자존심이 상했는지 별다른 반응을 취하지 않고 그는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그들 무리도 덩달아 나가게 되면서 소란스럽던 강의실은 몇몇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시목은 그제야 책상아래 손을 내리고 자신의 오른손에 구겨져있던 종이를 슬며시 펼쳤다.
예상대로 총, 그리고 뒤에 작게 그려진 것은
꽃 한 송이였다.
#4
"망했다 망했어..."
여진은 미친 듯이 책을 털고 가방을 뒤졌지만 나오는 것은 먼지뿐이었다. 나무벤치에 앉아 여진은 무엇인가 열심히 찾고 있었다. 다른 한쪽에 가지런히 놓인 종이들에는 사람 얼굴부터 책, 인력거를 끄는 사람의 뒷모습까지 수많은 종류의 낙서들이 있었다.
"왜 하필 그거 하나만, 왜?"
운명의 장난이라고 생각했다. 왜 하필, 다른 건 없어져도 되는데 , 그 많은 종이 중 그거 하나일까 여진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다시금 책을 털었다.
"이걸 찾습니까?"
종이 찾기에 완전히 몰두한 여진에게 그림자 하나가 드리워졌다. 뭔가 싶어 고개를 올려다본 여진은 재빨리 손을 뻗어 무언가를 낚아채려 했다.
"...주시죠."
그러나 아쉽게도 여진은 시목의 손에 있는걸 빼앗는데 실패했다.
"무슨뜻인지 알고 그린 겁니까?"
"아뇨, 몰라요. 길가다 보이는 걸 그렸을 뿐이에요. 그러니까 그거..."
"왜, 하는 겁니까?"
아차. 갑작스러운 시목의 조선어에 여진도 조선어로 대답한 것을 깨닫고 여진은 입을 다물었다.
"총, 오얏꽃."
"지금 뭐하자는 겁니까?!"
여진은 시목이 두 손으로 종이를 잡는 것을 보고 외쳤다. 시목의 두 손은 주저 없이 여진의 종이를 반으로, 또 반으로 찢었다.
"그게 무엇이든, 생각하지도 바라지도 마십시오."
#5
여진이 시목에게 낙서를 들킨 날 이후, 여진은 시목이 자신을 따라다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수업이 끝나고 시목과 마주쳐도 그저 지나가고 그저 경성제국대학의 일반적인 남학생처럼 취급하려 했다. 그러나 시목은 무슨 생각인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여진의 옆에 붙어있었다. 여진이 정신차려보면 항상 시목이 옆에 있었다. 어쩌다보니 가는 길이 같았다. 나도 도서관을 갈 참이었다. 별별 핑계를 대며 여진의 뒤를 졸졸 쫒아오는 시목이었다. 여진은 그런 시목이 슬슬 부담스러워졌고 이젠 심지어 수업이 끝날 때까지 강의동 앞에서 기다리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결국 3개월 뒤, 경성제국대학 안에선 한여진과 황시목이 서로 연인관계라고 소문이 났다. 하도 붙어 다니니 소문은 소문을 타고 경성 전체로 번져나갈 모양이었다. 경성제국대학의 최초 여학생이 법학과 수석과 정분이 났다나. 이 소문을 들으면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뉘어졌다. 최초와 수석의 연정, 아님 조선인과 조선인이라는 야유. 여진은 아무 말도 없이 묵묵히 자신을 따라다는 시목에게 의문이 생겼다.
"왜 자꾸 오는 겁니까?"
시목이 정당한 이유를 대며 옆에 있으니 가라고도 못하겠고, 그렇게 3개월을 보냈다.
"...불안해서."
"뭐라고요?"
"불안해서."
여진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그런 사람들은 순식간에 없어지니까."
치안유지라는 명목아래 반 일제를 외치는 사람들은 쥐도 새로 모르게 끌려가고, 없어지는 시대였다. 그렇게 되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시대. 여진은 시목이 작게 품고 있던 마음을 알아차렸다. 그제야 여진은 시목이 자신을 왜 그렇게 따라다녔는지 속내를 얼추 알아차렸다. 이후 그 둘은 강의가 끝나면 경성을 돌아다녔다. 시내에 돌아다니는 열차도 타고, 미쓰비시 백화점도 가서 옥상에 올라가 경성의 전경을 구경하며 시목과 여진은 여러 시간을 보냈다. 시간을 보내며 대화도 나누게 되었고 강의내용부터 사소한 이야기까지 두루두루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나 걸으면 걸을수록, 시간이 지날수록 시목은 여진과 다니면서 자신의 우려가 현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여진의 손바닥을 우연히 잡으면 느껴지는 얕은 굳은살. 가끔 가방을 들어주면 들리는 금속의 마찰소리. 그때 그 나무벤치에서 찢었던 종이처럼, 시목은 여진이 불안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희생하면 독립이 이루어진답니까? 왜 하필 당신입니까. 그냥 흐르는 대로 살면 안 되겠습니까?
여진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그렇게 흘러가는 대로 살다가 나도 모르게 닿아버리면요. 내가 가장 역겨워하는 곳에.
여진은 길거리에서 친일파 행세를 하는 사람을 보면 주먹을 쥐며 부들부들 떨었다. 시목은 여진이 왜 그렇게 싫어하는 감정을 가지고 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당연히 일본어를 쓰고, 주어진 대로 사는 것이 1930년대 경성의 조선인이 살아야하는 삶이라고 믿었던 시목이었다. 그래서 그는 여진이 자신의 옆에서 걸으면 간간히 들리는 금속소리가 너무 싫었다. 자신보다 더 붙어 다니고 애지중지 하는 것을 생각하면 질투가 났다. 그것보다 왜 굳이 그녀가 그 위험한 걸 들고 다녀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나보다 그 금속덩어리가 더 좋은 것일까.
“그 총... 좀 두고 다니면 안 됩니까?”
“왜요?”
“...”
여진은 그런 시목의 마음을 읽었는지 한번 대학수업이 끝나고 어딘가로 시목을 데려갔다. 시목은 어딘지도 모른 채 여진의 손에 붙잡혀 따라갔다.
"절... 믿습니까?"
"안 믿었다면 여기 데려오지도 않았겠죠. 나 명사수에요."
여진은 순간적으로 자세를 잡고 저 멀리보이는 나무 위 무언가를 향해 총구를 겨눴다. 누군가 총 쏘는걸 자주 보지 못한 시목은 잘은 몰라도 여진의 자세가 안정적이라는 것을 느꼈다.
탕- 소리와 함께 새들은 푸드덕 날아가고 여진의 총구에선 희미한 연기가 피어나왔다. 만족스럽다는 듯이 희미하게 올라가는 입 꼬리는 시목의 눈을 사로잡았다. 순간 시목의 몸엔 힘이 들어갔다. 시목은 여진의 모습에 완전히 몰입해 눈을 떼지 못했다. 동시에 시목의 안에선 동시에 뜨거운 것이, 아니 역겨운 것이 식도를 타고 올라왔다. 시목의 내면에는 그 무엇도 아닌 질투가 동했다. 조국을 위해 노력하는, 그게 아니더라도 무언가를 향해 나아가는 그녀와 달리 나는 그동안 무슨 존재로 살아왔는가. 그녀의 곧은 자세에서 신념이 느껴졌다. 시목에겐 없는 것을 여진은 가지고 있었고 시목의 얼굴은 핏기가 사라지며 심장박동은 거침없이 커져갔다.
#6
"부탁이 있어요."
한동안 시목은 여진을 따라다니지 않았다. 그 총소리 이후였던가, 시목은 이명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수업시간에도, 밥을 먹을 때도 그렇게 이명이 찾아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마비시키는 이명은 그렇게 시목을 말라가게 만들었다. 이명이 올 때마다 시목은 주먹을 쥐고 참아내려 노력했다. 그러나 그런 시목의 발버둥은 모두 허사였고, 그러쥔 주먹 속 손바닥은 손톱으로 인해 상처투성이였다. 며칠이 지나고 그런 시목의 앞에 나타난 건 여진이었다.
여진이 부탁한건 다름 아닌 시목의 재판견학에 자신도 데려가 달라는 것이었다. 법학과인 시목에게는 재판견학의 기회가 주어지는데 여진이 같이 가달라 한 재판은 우연찮게도 시목이 견학하는 재판과 같은 재판이었다.
"같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동지들, 이제 영영 볼 수 없을지도 몰라요."
시목은 여진의 부탁이 망설여졌다.
"뒤에서 그저 보기만 할게요."
아, 난 이 사람의 길을 따르겠구나. 그 끝이 어디든.
시목은 여진의 청을 거절하기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그녀에게 내주고 있었다.
#7
재판 견학날, 삼엄한 소지품 검문을 통과해 재판장으로 들어섰다. 시목이 안쪽에 앉고 여진은 시목의 왼쪽자리에 조심히 앉았다. 여진과 시목은 아래에 가방을 두며 재판에 집중하려고 했다. 비공개 재판으로 진행된 만큼 분위기는 조용하지만 어딘가 긴장감이 역력했다. 흉악범들의 재판이라서 그런지 내부의 공기가 사람을 굉장히 불편하면서도 집중하게 했다.
"피고 입장."
판사 3명과 검사는 이미 앉아있었고 변호사는... 없었다. 시목은 변호사가 늦는 것인지 이상해 쳐다보고 있었는데 피고가 줄줄이 입장했다. 죄수복을 입은 채 포승줄에 줄줄이 묶여 나온 사람 4명. 그들이 앉고, 재판을 시작하는 소리가 울렸다.
"1933년, 00월00일 "
이 재판은... 시목은 뭔가 이상한 것을 직감했다. 어디선가 독립만세를 외친 사람들. 여진의 옛 동지들.
“치안방해죄. 법정모독죄 등 태도가 불량하고...”
"...사형을 선고한다."
변호사 하나 없는 불공정한 재판이었다. 시목은 여진의 몸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여진의 오른손이 서서히 앞으로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시목의 동공은 크게 확장되었다. 여진의 가녀린 팔에 들린 건 다름 아닌 총이었다. 분명 재판에 들어올 때 삼엄한 검문을 마쳤건만 어디서 나온 총인 것인가. 그것보다 흔들림 없이 여진의 총구는 정확하게 판사를 가리키고 있었다. 떨리는 손과 함께 질끈 물은 입술에선 강인한 목소리가 재판장에 울려 퍼졌다.
"대한 독립 만세."
탄알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주변은 감당할 수 없는 혼돈에 빠졌다.
#8
시목은 몇 시간에 걸친 조사 끝에 순사에게서 풀려났다.
"너는 아무것도 모르고, 순진해 빠져서, 연정에 같이 가준거지."
"아닙니다."
"이게 다, 그 여자애가 꾸민거군."
"아닙니다."
"황시목, 석방."
시목은 조서도 들여다보지 않는 순사의 눈을 곧이곧대로 쏘아보았다. 순사는 말도 해결되지 않는 시목을 보자 거칠게 조서를 덮고 앞쪽으로 몸을 숙였다.
"그 계집은 사람 잘못건드렸어. 내정된 차기 총독을 죽여?"
순사는 책상위에 앉아 시목의 그 날카로운 눈빛을 쳐다보고, 분노 그 무언가에 떨리는 시목의 손을 흘깃 보더니 일어서 문 쪽으로 나가며 중얼거렸다.
"멍청한 놈."
시목은 순사가 나갔어도 조사실을 떠날 수 없었다. 그녀가 아직 이곳에 남아 있을 거라는 희망. 아니면 그녀는 이미 다른 곳으로 가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좌절에 책상위로 거칠게 주먹이 꽂혔다.
#9
시목은 터덜터덜 흐트러진 모습으로 경찰서를 나왔다.
'안 찾는게 좋을거야. 면회도 금지일테고. 유망한 우리쪽 판사를 죽였으니.'
'그년은 여기 지하실에서 맞아죽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걸.'
시목을 끌고 나오면서 했던 한 순사의 말을 되새기며 나뭇조각이 박힌 오른손을 들춰보았다. 나무 조각들은 조각조각 나눠져 시목의 피부에 파들어가고 있었다. 시목은 그 조각을 뺄 생각도 없는지 힘없이 손을 떨어뜨렸다. 주변이 어둑어둑하고 얕은 조명 하나가 시목의 앞길을 안내해 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목의 시야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시목은 그저 고개를 들었다. 하늘을 보았을 때, 누군가 시목의 눈에 시커먼 잉크를 들이부은 듯 칠흙 같은 하늘이 펼쳐졌다.
나를 쳐다봐주지 그랬습니까. 위험하다고, 그러지 말라고 말했을 때.
긴 조사 끝에 비척비척 걸어 집에 도착했고, 겨우 눕힌 몸은 시목의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우려가 현실이 됐다는 사실은 아무것도 먹지도, 잘 수도 없게 시목의 목을 조여왔다. 왜 내가 그녀에게 가진 감정이 겨우 질투였을까. 나에게 없는 뭔가가 그녀에겐 있다는 사실에 질투를 느낀 자신이 역겨웠고, 그럴 때마다 이명은 시목의 고막을 후벼 팠다. 차라리 죽여줬으면, 죽음으로 이 이명이 끝난다면. 정녕, 이제 그녀를 보지 못한단 말입니까. 그 끔찍한 사실에 시목은 2층의 두 평 남짓한 자신의 다다미방에서 끝없는 이명에 시달렸다.
#10
"학생, 누가 찾아왔어."
여진이 시목의 앞에서 사라진지 3일째. 시목의 방에 누군가가 찾아왔다.
"언니가... 자기 없어지면 이 주소로 오라고 해서..."
시목의 눈앞에 있는 학생은 이미 몇날며칠을 울었는지 눈이 새빨갰다. 울면서 왔는지 코는 빨갛게 익변해있었다
"잠시 들어갈께요."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시목은 속수무책으로 그 여학생을 방에 들였다. 여학생이 시목의 다다미방 한쪽에 앉더니 시목에게 무언가를 건네주었다.
"이거 전해주러요."
내부가 보이지 않는 갈색 유산지 봉투였다.
"미안하다고 그랬어요. 그 사람에겐 한없이 미안하다고. 이용해서 미안하다고. 애초부터 계산된 접근이었다고. 그래서 자기는 그 사람에게 함께 있을 자격도 없다고 그랬어요."
"언니는 매일 울었어요. 그 동지 분들 재판날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이불은 들썩였어요. 모른채 할려고 해도, 안해도 된다고 할려고 해도..."
시목은 잠자코 그녀의 쏟아지는 말을 들었다.
"언니 부모님은 3.1운동때 총살당하시고, 가족도 없이 외롭게 혼자 컸어요. 그런 언니를 거둬준 게 저랑 다녔던 학당이고요."
그랬구나. 시목은 그녀의 부모님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다는 생각에, 왜 그녀가 총을 잡기 시작했는지 이제서야 알았다는 사실에 마음 한쪽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누군가 귀에 총을 쏜 듯한 찌릿한 이명이 찾아왔다. 그 여학생은 시목과 여진의 사이를 대충 눈치 채고 있었던 터라, 시목의 반응은 충격에 의한 반응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의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으며 시목을 잠자코 기다렸다.
"왜... 그래야만 했습니까? 왜 꼭 죽였어야 했습니까."
"..."
"그냥 남처럼 살면 안됐습니까."
눈물을 닦던 여학생은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 판사가 죽인 저희 학당 동지들만 몇명인지 아세요? 학생 말고도 투사란 투사는 그 사람이 다 죽였어요. 그거 알면 우리 언니 그렇게 얘기 못해요. 선배들은 변호도 없이 도살장에 끌려가듯 매번 그렇게...!"
그 학생은 분노가 조절되지 않는것처럼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말을 이어나갔다.
"친일중의 친일이었어요."
#11
"통성명이 늦었네요. 이름이 뭡니까?"
"그쪽은..."
"전 황시목이라고 합니다."
"아, 맞다. 전 영은수라고 해요. 뭐 이제 없어질 이름이겠지만."
두사람은 그저그런 악수하고 은수는 시목의 방에서 나와 계단으로 내려갔다. 그 학생이 가고 시목은 천천히 책상앞에 앉았다. 그리고 봉투에 들어있는 것들을 책상 위에 쏟아내기 시작했다. 여진의 낙서들. 시목과 함께한 순간들로 가득했다. 경성을 걷고, 벚나무 아래서 도란도란 이야기하고, 같이 인력거를 탄 모습. 그리고 조그맣게 적혀있는 문구.
독립된 조국에서 만나요 우리.
시목은 너무나도 무기력하게, 여진의 흔적들을 모두 그러안고 책상 앞에서 무너져내렸다.
“이렇게 가면 난 어쩌라고.”
결국 일주일 뒤 시목은 한 경성제국대학의 한 여학생이 옥사했다는 사실을 신문 한 구석에서 읽을 수 밖에 없었다.
#1
"한여진이라고 합니다."
한여진 경위는 시목에게 악수를 청했다.
"여기 증거 보관실이 어딥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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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독립된 조국에서 만나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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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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