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별 후 솔메즈입니다. 시목-여진 순으로 시점 교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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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곳이 멍들어있었다. 멍든 하늘을 올려다 보는게 아팠다. 이 차가운 공기가 미워져도 한없이 쳐다볼수 없었다. 더 봤다간 더 울 것만 같아서, 내 마음도 침묵해야만 했다. 어디 한탄할 곳없는 마음이 시리다. 둘 곳 없어서 힘들어. 자르륵 꽁초가 축축한 땅에 내려꽂힌다. 또 마음이 찔린다. 저도 아플텐데. 추운 바닥에 뉘어서 저도 외로울텐데. 누군가의 입김에 있다가 사라진 그 삭막함이 서글플 텐데. 손을 털지 못했다. 그마저도 털어버리면, 정말로 가슴 아파할까봐. 저 작디작은 무생물에 대입하는 감정을 두고 떠난다. 밟지못한 불꽃이 비를 맞고 사그라든다. 떠난자릴 저만치 떨어져서 보는 남자는 운다. 지붕을 벗어나서는 하염없이 운다. 정장 끝에 방울이 매달린다. 떨어지기 싫다고, 떠나기 싫다고. 그래서 더 운다. 모진 빗방울이 불쌍해서, 더 운다. 그 날로 황시목의 흡연 37일차가 지나가고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걸까. 나약해진 몸뚱아리가 질퍽한 길만 골라서 걷는다. 물 웅덩이를 피하지 않고 걷는다. 줄곧 숙인 고개앞으로 물기젖은 머리카락이 내려온다. 내가 그때, 당신이 비 맞고 울면서 왔을때, 더 꽉 안아줄걸. 더 좋아한다말할걸. 그냥 그 자리에서 오지도 않을 영원처럼 사랑한다 고할걸. 동그랗던 단발끝을 생각한다. 푹 젖어 늘어진 그녀의 양말을 생각한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미안하지 않아요. 난 사랑해. 입을 여니 소주향이 풍기던 그 날을 회상한다. 날 보며 더이상 미안해 말고 사랑해달라던 당신을 회상한다. 사랑해. 사랑한다고. 그 시간 불꺼진 포장마차를 두고 귀가하고 있었다.
고백할 것이 모두 어설프던 시절이 있었다.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한다는 고백이 모두 미안하단 말로 침묵되던 적이 있었다. 그 흔적은 벌을 내렸다. 사랑할 자격이 없노라고. 그러니 평생토록 미안하고 미안하고 미안해라고.
1
취중진담
작은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 재즈인지 클래식인지도 모를 음악이 피아노에서 이 오묘한 술집을 채우고 있다. 잔이 쨍그랑 거리는 소리가 거슬린다. 저들이 부딪힌 잔들보다, 내가 채운 수갑이 더 많을까. 그랬으면 좋겠지만 그러면 안되었다. 이 시간에 음악에 취해 잔을 부딪히는 여유보다, 위험한 치안때문에 불안에 떠는 이들이 많아질테니. 아직 일 생각을 하는 것보니 퇴근한지 얼마되지 않았다. 이제 9시 반이다. 그저 나홀로 길을 나서다가 뜻모를 전화에 앉아버린 것이다. 그것도 한번도 와보지않은 술집에. 이유라곤 그 뜻이 궁금해서, 다 읽지도 않은 내 어린 날의 얘기를 보고 싶어서. 하. 어린 날이라기엔 너무 웃긴가. 난 이제 서른 둘임에 거짓없고 사랑을 아직도 잘 모른다. 그치만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웅성거리듯 사랑을 읊던 그에게 사랑을 갖다바친 건 틀림없다. 그가 내 과거 감정의 전부일지도. 하. 두번째 자조는 더 길다 싶다. 조금씩 후회라는 그림자가 몸을 지배한다. 이기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마주친다. 잔과 잔이, 그리고 내 몸과 뜻모를 전화의 주인이. 그 표정이 휑하다. 텅 빈 마음이 아니다, 있던 것이 사라져 휑하다. 미친듯이 쓸어내리는 창문밖 저 비처럼. 난 왜 비가 되어야만 했나. 그를 이렇게 까지 비참히 휩쓸어 갔어야 했나.
"..실수인지도 모릅니다 아침이면 생각 안날지도 몰라요. 그래서 불안해 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근데, 그러니까. 못미더워도 믿어줘요. 진심이니까. 전 처음부터 ..사랑이었습니다. 미안한 것도, 좋았던 것도 사랑해서 가능한 겁니다. 사랑해요. ..어설픈 제 말이, 촌스러울 수도 있는데,... 진심입니다. 아침이오면, 다시 그때처럼, 안고싶어요. 당신을."
세 번째다. 내가 미친척하며 실실거리며 웃고 있는것도, 전 남자친구랍시고 앉은 사내가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것도. 우린 취했는지도 모르겠다.
2
기억을 걷는 시간
아직도.
너의 온기를 느끼는 내가 싫다. 바람을 타고 쓸쓸히 춤추는 저 낙엽 위에도, 뺨을 스치는 밤 중의 공기 속에도, 당신이 옆에 있는 것 만으로도 따뜻해지는 내가 싫다. 아깐 술 기운에 말이 술술 나왔다. 당신이 내 맘을 알아줬으면 좋겠어서 말이 서슴없이 나왔다.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에 한여진이라는 사람이 있다고 말하고 싶어서,그랬다. 지금도 내 왼편에 걷는 발소리가 내 귀를 붉게 물들이고, 내 왼쪽에서 시작되는 숨결이 내 뺨을 붉힌다.
"울어요?"
가장 듣고 싶었던 목소리가 가장 듣고 싶은 말을 한다. 매일 혼자 들리는 척하며 살았던 목소리가 날 위로한다. 끄덕인다. 어떻게 이 순간에서 안 울수가 있겠어요. 나는 어쩌면 늘 당신에게 긍정이다. 우연히 든 유리잔에 비친 당신모습은 당연히 날 보러와준 한여진 경감이어야만 했고, 옷 매무새를 다듬으려 본 거울에 비친 당신표정은 꼭 나와 함께 출근해야하는 연인 한여진이어야만 했다, 나의 긍정은 참 이기적이었구나.
"왜 울어요, ..아직도."
아직도, 당신때문에 울어. 같이 걷던 기억을 이젠 혼자 걸어서 울어. 이제 정말 그 기억을 걷어내야될까봐 속상해서 울어. 당신은 어떤지 묻고 싶은데 당신도 나와 같은지 알고 싶어서 미치겠는데, 아니라고 할까봐. 다시 없던 일로 될까봐, 그래서 웁니다. 바닥이 요동친다. 시야가 흐렸다가 분명해진다. 그렇게 난 또 한번 침묵을 강요당한다. 내 자신에게, 아직도.
3
회상
"혼자 퇴근했었어요. 근데 이상하게 같이 걷는 것 같더라고요, 검사님이랑. 자연스레 말이 흘러나왔어요. 오늘 사건 힘들었다고, 밥 먹을 시간도 없었다고. 서부지검 가는 일을 또 장형사한테 미뤄버렸다고.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도착한 곳이 어딘지 알아요?"
"..."
"..포장마차. 검사님 집앞 포장마차요. 아무렇지 않게 자리에 앉았어요. 우리 늘 앉던 데 있잖아. 거기 앉아서, 소주 한 병 잔 두개를 시키는데, .. 앞에 사람이 없는거에요. 그 상태로 얼어붙었어요. 술이 나와도 마시질 않고서."
그 순간 앞에 있어야 할 사람. 아니, 그 사람이 그래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늘상 그렇듯,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게, 내 맘을 얼렸다가 녹였다가 요리했으면 좋겠었다. 그래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잊고 지내고 싶었다. 그땐 내가 나이기 싫을 때 였다. 정의롭고 정의롭고 또 정의로워야만 했던 그 시절의 한여진이 미운 시점.그 사람 옆에선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그래서 필요했다, 황시목이. 지금 그 사람이 내 옆에있다. 여전히 추우면 귀가 먼저 빨개지는 구나. 꼭 다문 입술이 울음을 참으려는 게 눈에 보인다. 굳이 애쓰지 않아도 되는데.
퀘퀘한 것이 코 언저리에 맴돈다. 계속 머물다가, 움츠리다가, 돌아다니다가 ··· 피해야 하지만 피하고 싶지 않다. 담배냄새 였다. 이윽고 그것이 떠났다. 묻지 않았다. 왜 담배를 피느냐고. 미운 건, 오히려 나였다.
어쩌다보니 그 사람의 집이었다. 캐모마일을 들고 왔던 첫 방문이 스친다. 웃기네, 이런 거. 밖보다 안은 따뜻했지만, 이상하게 몸은 녹질 못했다.
4
이런 엔딩
늘 정해진 규칙처럼, 창가소파는 내 자리였다. 다만 달라진 건, 거실 테이블에 쌓인 선물들. 낯선 풍경에 놀라는 너가 고맙다. 이렇게 놀래키려고 다 산건데,
"이게 다 뭐에요."
"... 회의에서 받은 것들이요."
"솔직히 말해줘요."
"출장에서, .. 받고 산 것들이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지방이건 해외 건 출장을 다녀오라고 하면, 당신 선물 먼저 고르는 것. 그래서 주지도 버리지도 못하고, 다짐만을 반복하다가 이렇게 매일 아침 거실 테이블위에 둬 버리는 것. 검은색이 좋대서 옷이고 향수고 검은색이 있는 로고라면 사고 다녔던 것.
찌푸린다. 웃는 걸 보고 싶었던 건, 욕심이 었구나.
"제대로 잘 먹어요. 다 지나가니까. 예전처럼 잠도 잘 자게 될 거에요. 진심으로 빌게요, .. 검사님은 행복할 자격 충분한 사람이니까."
대답은 의외였다.
"그런 말 하지 마요."
"..나는 그냥, 검사님 걱정되서 한 말이에요. 이게 다 뭐야. 원래 여기서 일하잖아요."
고개를 떨군다. 어쩔 수 없는 싸움이라는 게 있다고 했었다. 사랑해서 싸울 수 밖에 없다던 당신의 웃는 얼굴이 기억난다. 근데, 이젠 나만 사랑하잖아. 당신은 아니잖아. 이것도 .. 사랑싸움 인 겁니까.
아무말 없이 캐모마일을 끓였다. 아무생각 없이 정해진 자리에서 차를 마셨다. 아무노력 없이 차를 같은 시간에 내려놨다. 내가 당신에게 맞추고, 당신이 나에게 맞춰서 이뤄낸 것. 차를 마시는 시간을 같게 하는 것. 그것이 이젠 소용없어졌구나.
어떤 소용도 이유없이 이뤄 낼 수 없었다. 나는 내 사랑의 소용을 말해야 했다.
손으로 두 눈을 가렸다. 한참의 정적 후에, 흰 손이 내 손을 잡는다. 이것도 우리가 서로에게 맞춰서 이뤄낸 것. 동의였다. 손을 끌어내려 눈꺼풀에 한 번, 두 번 입술이 닿는다.
당신이 웃는다. 달지 않았다. 역시나, 아니었구나.
소파에 일어나서 나를 향해 다시 웃는다. 썼다. 쓰디쓴 웃음이 내게 이룩한다.
이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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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 줄 거라며
다 뭐야.
어떤 맘을 준 건지 끝내 모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