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검사님 잠깐 나올 수 있어요? 저 지금 남해예요.”

 

 

시목은 되는 대로 급하게 코트와 머플러를 걸치고 밖을 나섰다. 꽤나 오랫동안 서로 연락을 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전화해 놓고는 남해라니, 시목은 잘 알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한 번 짓고는 터미널로 차를 몰았다. 하지만 아무 연락 없이 남해에 내려온 여진의 사정도 잘 모르겠지만 그 잘 모르겠는 도중에도 잘 알지 못하는 설렘이 있었다. 약 30분 간 운전해 터미널에 도착한 시목은 여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십니까?”

“저 그 터미널 정문? 정문이라고 해야 하나, 그 가장 중앙 게이트 앞에 서 있어요. 스웨터에 노란 코트 입고.”

 

여진의 설명에 따라 게이트로 향하던 시목은 약간 쌀쌀한 날씨 탓에 살짝 얼굴을 찌부리고 있었다.

 

“어, 어, 검사님~. 여기요, 여기!”

 

여진은 오랜만에 보는 시목에 반가워 팔을 이리저리 휙휙 흔들었다. 이내 시목이 여진을 발견하고는 그 쪽으로 걸어왔다.

 

“검사님, 너무 오랜만이에요.”

“그러네요, 한경위님. 아, 이제 경감님이시죠. 연락도 없이 여기는 웬일입니까?”

“에이~ 뭐 우리가 꼭 연락해야 만나고 그런 사인가?”

 

시목은 딱히 할 말도 없다는 듯이 여진을 쳐다봤다. 괜히 머쓱해진 여진이 날씨가 꽤 쌀쌀하다며 시목을 재촉한다.

 

“아, 여기 날씨가 되게 춥네요? 생각보다. 빨리 차에 탑시다.”

 

생각보다 오랜만에 만나는 것치고 어색하지 않은 그런 재회였다.

 

 

시목이 일하다가 급히 나와 자신을 데리러 왔다는 것을 안 여진은 미안한 마음이 들면서 내심 후회를 했다. 아, 연락 좀 하고 올껄.

 

“연락 좀 하고 올껄하고 후회하셔도 이제 의미 없습니다. 벌써 오셨잖아요.”

“아니 제가 후회하고 있는 건 또 어떻게 아셨대요. 아이 진짜 또 일하는데 미안하네요.”

“어차피 퇴근시간은 지났으니까요. 그냥 잠깐 들려서 보던 서류나 챙겨 나올게요.”

 

지청으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멀었다. 가을의 저녁 7시 즈음은 막 노을이 지고 있었다.

여진은 바다 위로 보이는 노을이 많이 예쁜지 시목과의 대화를 잠깐 멈추고 조용히 하늘을 바라봤다.

 

그리고 시목은 그런 여진을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온 이 사람을. 평소 성격의 시목이라면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솔직히 시목은 대뜸 전화를 걸어 터미널로 데리러 오라는 여진에 조금 많이 당황했다. 아무리 여진이라고 해도 시목이 별로 좋아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런 식의 만남은. 글쎄, 하지만 달랐다. 당황스러운 마음도 컸지만 제 예상보다 더 반가운 마음이 컸다. 저 멀리서 예전에 봤던 그 웃는 얼굴로 반갑게 손 흔드는 여진이 시목도 반가웠다.

 

여진은 계속 가을 하늘의 노을과 남해의 바다를 눈으로 쫓고 있었다. 사방에 건물밖에 없는 서울에 있다가 이런 곳에 왔으니 좋을 것이다. 왠지 힘들었을 것만 같은 여진이 잠깐의 휴식을 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었다. 해안을 따라 휘어지는 도로 위에서 차 안에서 시목도 살짝 미소를 지었다.

 

어느새 지청에 도착한 시목은 피곤해 잠들어있는 여진은 깨우기 위해 어깨에 손을 올리려다 예전에 여진이 제 사무실에 잤던 일이 생각났다. 그때처럼 잠깐 시목의 손은 여진의 어깨 위에서 방황했지만 이번에는 여진을 흔들어 깨웠다.

 

“도착했어요.”

“으음”

 

여진이 소리를 내며 여전히 졸린 몸을 쭉 뻗었다. 그러더니 눈을 몇 번 깜빡이고는 얼굴을 짝 짝 두 번 가볍게 두드린다.

 

“아, 여기가 검사님 일하는 데구나. 앞장서시죠, 검사님. 저도 구경해 봐야겠네요.”

 

그 말에 시목이 피식 웃었다. 시목의 웃는 모습에 여진은 조금 놀랐지만 같이 따라 웃으며 차에서 내렸다.

 

여기는 규모가 작아서 검사실이 따로 없어요, 라는 시목의 설명을 들으며 여진도 그의 뒤를 따라갔다. 시목은 곧 제 자리에 다다라 서류를 몇 가지 챙겼다. 여진은 여전히 깔끔한 시목의 책상을 보며 예상했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며 주변을 구경했다. 그러다 시목의 자리 뒤에 위치한 서랍 위에 놓인 액자를 발견하고는 그 앞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특임팀이 여진의 옥탑방에서 회식하던 날 찍은 사진이었다. 시목과 자신, 계장님, 실무관님, 건이 있었고 그리고 윤과장, 영검사. 괜히 또 사진을 보니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는 어쩔 수 없었던 일임을 알았지만 다시 마음이 무거워졌다. 정리를 다하고 여진을 돌아본 시목은 그녀의 표정을 발견했다.

 

“경감님.”

 

아무 말 없이 여진이 시목을 돌아봤다. 다시금 울컥한 건지 여진은 조용하기만 하다.

 

“볼 거 다 봤어요? 아직 다 안 본 거 같은데.”

 

시목의 말에 여진이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시목은 모르는 체를 하고 괜히 한 번 책상에 손을 올렸다. 무의식적으로 시목의 움직이는 팔을 보던 여진이 무언가를 보고는 토끼눈이 되어서는 시목을 쳐다봤다.

 

“어? 검사님. 이거 내가 검사님 남해 내려가기 전에 그려준 거잖아요?”

 

이거 갖고 있었네! 심지어 여기 이렇게 모니터 옆에다가 붙여놓고! 금세 표정이 밝아진 여진은 좋아라하며 시목에게 감동의 눈빛을 보냈다.

 

“경감님, 그렇게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털납니다.”

 

아 진짜 사람이 왜 이렇게 능글 맞아졌어요? 전 모릅니다 그런거. 서로 웃긴지 작은 웃음이 입 사이로 피식 피식 새어나왔다.

 

“이제 저녁 먹으러 가야죠.”

“네, 제가 다 검색해 왔어요.”

“거기보다 다른 데가 더 맛있을 거 같은데요.”

“어디요? 설마 또 국밥집은 아니죠?”

“아니고 횟집입니다.”

“좋아요. 그럼 출발합시다.”

 

그렇게 횟집에 도착해서 벌써 1시간 동안이나 밥을 먹었다. 그동안 서로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진은 당분간 남해에서 지내기로 했다고 했다. 사실 한 달 동안이나. 여진이 기를 쓰고 조사하던 일이 국회의원과 깊게 결탁하던 일이었고 포기 안하고 계속 조사하던 여진은 정직 처분을 받게 되었다.

 

“참 세상 무서워요? 이렇게 국회의원 뭐 좀 파면 바로 경찰을 정직시키고.”

 

여진이 궁시렁대며 소주잔에 담긴 소주를 한숨에 들이켰다. 시목도 따라 한 잔 마셨다.

 

“그러면 숙소는 한 달 동안이나 잡아놨다고요?”

“네. 좀 돈이 들긴 하지만 이참에 푹 쉬어야죠, 뭐. 별 수 있겠어요?”

 

여진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한 달 동안 자유네요, 여진은 몇 시간이나 버스 타고 온 몸이 많이 찌뿌둥한지 이렇게 저렇게 스트레칭을 했다.

“숙소까지 데려다 드릴게요. 이제 들어가서 쉬세요.”

“밤바다 보고 싶은데.”

“나중에 보면 되죠.”

“검사님도 같이요?”

 

“네, 저도 같이요.”

 

여진을 숙소에 들여보내고 집에 오는 길에 시목은 같이 바다를 보는 날이 금방 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진이 남해에 내려온 지 일주일이 다 되어갔다. 여진은 열심히 자신이 다녀온 곳에서 인증사진을 찍어 시목에게 보냈다. 그런 얘기는 하지 않았지만 여진은 혼자 열심히 보내고 톡을 했다.

 

‘검사님 언제 쉬어요. 그러다 골병 들어요.’

‘검사님 곧 주말이네요. 저 밤바다 보려다가 늙어 죽겠어요.’

‘정직 당해서 슬펐는데 막상 쉬니까 너무 좋네요.’

‘나중에 은퇴하면 여기서 살까봐요.’ 등등.

 

시목은 나름 여진이 보내는 내용이 재밌었다. 삭막한 일상에서 즐거움이랄까.

 

그리고 토요일이 되었다. 여진은 아예 저녁에 만나는 게 좋겠다며 문자를 보내왔고 시목은 덕분에 잠깐 동안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점차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이 다가오고 시목은 옷을 챙겨 입고 여진을 마중 나갔다.

 

“오늘은 대망의 밤바다 보는 날이네요.”

“네, 그러네요.”

“일단 밥부터 먹읍시다.”

 

이렇게 또 둘은 밥을 먹으러 갔고 근처 카페에도 들렸다. 바다가 잘 보이는 것이었다. 꽤나 어둑어둑해져서 햇빛에 빛나던 바다는 달빛에 빛나는 밤바다가 되어있었다.

 

“여기서도 바다가 잘 보이네요.”

“그래도 나가서 보셔야죠.”

“그럼요. 여기까지 왔는데.”

 

바깥에 나오니 생각보다 바람이 서늘했다. 하지만 아무도 춥다고 내색하지 않았다. 멀리서 밀려오는 파도소리만 잔잔하게 공기를 메웠다. 여진은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멀리 밤바다를 바라보았다. 시목도 여진을 따라 그 옆에 섰다. 그리고 똑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파도소리와 수많은 별들, 어두운 밤바다 그리고 두 사람이 있었다.

 

강해져 오는 바람에 둘은 시린 두 손을 마주잡았다. 손이 시리다는 이유로. 하지만 그것이 단순한 핑계라는 걸 둘 다 알고 있었다. 그리고 갑작스레 남해에 온 여진에게 시목이 화나지 않는 이유를, 시목이 오랫동안 연락하지 않아 서운했던 마음이 보자마자 일순간 사라진 이유를 그 둘 모두 알고 있었다.

 

그저 손을 더 단단하게 마주잡고 둘은 어두운 바다를 바라보았다. 끝은 알 수 없는 어둠이었지만 하늘에는 별이 무수히 박혀있었고 맞잡은 손이 있었다.

 

“우리가 같이 걷게 된다면 저런 어둠 속이겠죠?”

 

여진이 시선을 옮기지 않고 시목에게 물었다.

 

“그래도 계속 걸어야겠죠.”

 

시목이 여진을 보며 말했다. 여진이 천천히 시목을 바라보았다.

 

“혼자는 좀 무서울 거 같은데 같이 가줄 수 있어요?”

 

시목이 여진을 제 곁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그녀의 눈을 쳐다보았다. 지금 여진의 감정이 어떠한지는 가늠할 수 없다. 다만 자신은 이 사람 옆에 서있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시목이 천천히 그녀의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맞잡았던 손의 온기 덕에 차갑지는 않았다.

 

“그럼요.”

 

한마디와 함께 서로를 마주보던 두 눈을 감고 입을 맞추었다. 서로 목을 끌어안은 탓에 옷이 흐트러져 목에는 차가운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춥지 않았다. 당신과 나누는 입맞춤으로 당신의 따듯함과 사랑을 느낄 수 있었기에.

그곳에서

연팡 @alreadyGreentd

© 2019 by Soulmates Collaboration

Background photo by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