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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기념일

   어느새 봄이 찾아왔는지 따사로운 해가 밝고 눈이 떠질 땐 이불은 아무렇게나 접혀 이미 시목의 몸을 떠나 있었다. 더위를 잘 타는 여진의 습관이 시목에게도 배어졌는지 이렇게 닮은 모습을 마주 할 때면 저도 이제 누군가에게 익숙해지고 있다는 사실에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리곤 했다. 옆에서 아직 자고 있는 여진의 볼에 살짝 입 맞추며 그녀의 하루 시작을 언제나 자신으로 만들어버리는 시목은 오늘따라 더 여진의 모든 시간들을 모두 자신으로 물들게 하고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기념일 같은 건 시목이 살아오면서 단 한번을 챙겨본 적도, 챙김 받은 적도 없었다. 더군다나 오늘은 여진이가 없었다면 시목의 인생에서 평생 없었을 날이다. 두 사람이 만나 사랑을 하고, 그럴 리 만무했던 일들이 일상이 되고, 서로의 안부를 수시로 물으며, 잘 자라는 인사를 미어지게도 했던 수많은 밤들이 모여 앞으로의 시간도 평생 서로를 사랑하며 살겠다는 약속을 맺은 날이다. 시목은 침대에 누워 있는 여진의 팔을 가볍게 잡아당겨 일으켜 세운다. 헝클어진 머리칼을 살짝 넘겨주고, 잠결에 떠지지 않는 여진의 눈을 보며 살포시 웃음을 터뜨린다. 마음 같아선 이대로 껴안고 침대에 다시 누워 느지막이 일어나 하루 종일 붙어서 그렇게 조금이라도 떨어지지 않은 채 오늘 하루를 보내고 싶지만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만들어주는 사회 때문에 저도, 여진도 각자의 일터에 나가야한다. 힘겹게 침대에서 몸을 떼고 여진이 씻을 동안 시목은 간단한 아침을 준비한다. 햄이랑 계란을 넣은 토스트인데 시목이 만든 음식 중 여진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특별한 게 들어가 있지는 않지만, 혼자 살 때 매번 아침을 거르던 여진이는 날마다 달랐던 토스트 안 내용물을 보면서 결혼 하나는 내가 잘했다며 농담조로 웃곤 하였다. 시목은 여진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며 아침을 차리는 또 하나의 취미가 생겼다. 어쩌면 밥보다 군것질을 더 많이 하던 여진에게 제대로 된 끼니를 먹게 해주고 싶었고, 아침뿐만 아니라 다른 끼니도 항상 챙겨주려고 노력했다. 이제껏 꽤 많은 요리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여진이 정작 제일 좋아하고, 맛있어하는 건 토스트니, 시목은 누가 보면 맨날 토스트만 먹이는 줄 알겠습니다. 하고 불평 아닌 땡깡을 부리면 여진은 언제나 다른 것도 다 맛있죠~ 하고 달래주며 뽀뽀를 해주었다. 오늘은 무난한 햄 치즈 계란 토스트였다. 이것 역시 다양한 다른 재료들이 가득 들어간 토스트보다 기본 재료들만 들어있는 토스트였지만, 여진이 가장 좋아하는 조합이었다. 씻고 준비까지 마친 여진이와 잠시 식탁에 앉아 한 입을 앙 깨물며 오늘 일을 마치고 뭘 하면 좋을지에 대한 대화를 나눈다. 특별한 날, 특별하게 보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게 만드는 일 더미에 특별한 서로와 함께 보내는 시간들에 만족하기로 했다. 시계를 쳐다본 후 늦겠다며 서둘러 토스트를 먹는 여진이 에게 그래도 천천히 먹으라며 시목은 손을 뻗어 여진의 앞머리를 살짝 정리 해준다. 마지막 한입까지 꼭꼭 씹어 삼킨 뒤 둘은 자리에서 일어나 나갈 채비를 한다. 여진의 가벼운 겉옷을 여며주며 자신의 재킷까지 걸친 뒤에 신발을 신고 주차되어 있는 자동차에게로 향한다. 둘만 타 있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쪽쪽 입 맞추며 나랑 같이 살게 된 걸 축하해요 검사님. 이라며 장난 섞인 다정을 뱉는 여진에게 쪽쪽쪽 입 맞추며 영광입니다. 하고 시목은 대답한다. 시목의 차에 같이 탄 둘은 먼저 용산서로 향한다. 그들에게는 버릇이 하나 생겼는데 운전하는 사람이 누구든, 옆에 탄 사람이 누구든 그게 서로이면 항상 한 손은 서로의 손과 함께 있는다. 주차장에서 빠져나가기도 전에 시목의 오른손은 여진의 왼손과 깍지를 끼고 있었다. 길가로 나온 자동차 창밖의 하늘은 구름도 없이 파랗게 맑았다. 좋아하는 시간은 언제나 짧게 느껴진다. 신호등을 다섯 번은 기다린 것 같지만 어느새 차는 용산서 앞으로 다다라있었다. 차에서 내리기 전, 나 갈게요 쪽 좀 이따 봐요 쪽 연락하십쇼 쪽 잘 보내고 와요 쪽 나 이제 진짜 간다. 쪽 운전 조심히 해요 쪽 누가 봤다면 경찰서 앞에서 작작들 하라며 한 소리를 할 만큼 넘쳤던 애정행각이 끝나고 여진이 차에서 내렸다. 그녀가 경찰서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까지 다 보고 난 뒤 시목은 다시 차를 움직여 서부지검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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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근무를 마치고, 점심시간이 됐을 때, 시목은 여진에게 경찰서 앞으로 간다는 문자를 보냈다. 사실 틈틈이 계속 연락하고 있었지만, 여진이 바쁠 땐 연락의 텀이 길어졌기 때문에 점심시간에 잠깐 짬을 내서 여진을 볼 수 있다는 건 시목이 지검에서 보내는 시간 중 가장 기다리는 시간이다. 걸어놨던 재킷을 입고 점심 맛있게들 드시라는 말과 함께 사무실에서 나온 시목은 그새 여진에게 전화 중이다. 지금 출발 한다며 빨리 갈 테니 조금만 기다리라는 시목의 애정 섞인 말에 같이 엘리베이터 안에 있던 강부장은 경악을 했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보고 싶다는 말까지 꿋꿋이 전한 시목이었다. 오후에 비가 잠깐 온다는 기상 예보가 있었지만 그 예보가 무색하게도 아침과 같이 파랗고, 맑았다. 여진을 데려다 주는 것과, 여진을 데리러 가는 건 미묘하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다. 데려다 주는 건 아주 잠깐이라도 떨어져 있어야 하지만, 데리러 간다는 건 이제 곧 만날 수 있다는 설렘이 주는 아주 작은 그 무언가가 시목을 미소 짓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여진을 만나러 가는 지금이 더없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며 자동차 바퀴를 빠르게 굴렸다. 도착했으니 나오라는 문자에 2분도 안 걸려서 경찰서 밖으로 나오는 여진의 모습이 보였다. 멀리서도 시목의 차를 단숨에 찾고 총총 거리며 뛰어오는 여진이 차문을 열고 옆자리에 착석했다. 보고 싶었다고 말하는 여진에게 시목은 몇 시간 전에 봤으면서 또 보고 싶었냐며 물었다. 실은 자신의 이야기면서 마치 제 일은 아닌 양 말하는 것이 시목이 저 스스로도 웃겼다. 진짜 몇 시간 떨어졌다고 또 보고 싶은지 이렇게 제 앞에 여진이 있으니 그저 맥없이 좋은 걸 티내지 않으려 해도 씰룩거리는 입 꼬리는 벌써 호선으로 올라가 있었다. 시목은 여진을 만나면서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여진도 느끼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겼는데 이도 그랬다. 내가 여진을 보고 싶어 하는 만큼의 반이라도 여진이 자신을 생각해줬으면 좋겠다, 내가 여진을 사랑하는 만큼의 반이라도 여진이가 저를 깊게 사랑하고 있었으면 좋겠다 하는. 어쩌면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 나타날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바람들이 시목에게도 찾아온 것이었다. 때때로 시목은 자신이 이기적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여진의 사랑에 목마른 건 여전했다. 여진이 며칠 전부터 가고 싶어 했던 음식점은 서둘러 갔는데도 이미 사람들이 길게 줄 서 있어 다음으로 미루고 그 근처 초밥 집으로 둘은 들어갔다. 시목은 원래 초밥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여진을 만나고 나서부터 따라 먹다보니 어느새 여긴 이 초밥이 맛있고, 저긴 저 초밥이 별로고...까지에 이르렀다. 생각해보면 여진을 만나고 나선 변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좀 더 잘 웃게 되고, 좀 더 감정을 표현하게 된 것 뿐만 아니라. 모든 게 여진을 기준으로 바뀌어버렸다. 사람을 너무 좋아하게 되면 그 사람의 다른 모든 것들도 함께 좋아하게 된다는 말, 시목이 요즘 매우 공감 중인 말이었다. 한여진이 취향이 되니 본래 자신의 취향은 온데간데없고 여진이가 좋아라 하는 건 따지지도 않고 같이 좋아졌고, 싫어하는 건 덩달아 싫어하게 됐다. 시목도 자신이 언제 이렇게 됐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 변화들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변화들이 반가웠다. 자신이 달라지니 지금 이렇게 제 앞에서 연어초밥을 볼 안 가득 오물거리며 먹고 있는 여진과 함께할 수 있는 것이니, 단지 이 모습을 보기 위해서라도 백번이고 달라져야 한다면 시목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달라지겠다는 대답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행복했다. 끝나지 않는 해피엔딩이 일상에서 계속 됐다. 서로를 마주보며 지금처럼 행복한 날들로 쌓여갈 시간들이 앞으로도 지속될 테지만 당장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이 아쉬울 정도로 시목은 완벽하게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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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날이 저물고 길었던 하루가 끝이 났다.

여진을 데리러 가기 전 시목은 케이크와 와인 한 병, 그리고 여진에게 줄 향수를 샀다.

전부 여진이 좋아하는 것이었다. 생크림이 가득 올려져 있는 딸기 케이크, 단 맛이 강한 레드와인, 숲 향이 묻어져 나오는 향수. 하나하나 여진을 생각하며 고른 것이다. 시목은 사온 것들을 뒷 자석에 고이 올려두고, 살짝 올라간 입 꼬리와 함께 여진에게로 향했다. 둘 모두 일찍 일을 마친 게 아니라 그런지 하늘은 제법 어두웠다. 어두워지니 조금 쌀쌀해진 날씨에 오늘 아침 얇은 겉옷만 걸치고 갔던 여진이가 생각났다. 요샌 저녁까지 날씨가 따뜻해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오늘은 또 바람에 차다니, 얼른 가야겠다는 생각에 시목은 더 빨리 페달을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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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을 태우고 집으로 돌아왔다.

차에서 선물을 가지고 내린 시목을 보며 언제 이런 걸 준비했냐는 여진의 웃음에 시목도 따라 웃었다. 케이크를 베어 물며 배시시 웃는 여진이를 보며 시목도 따라 웃었다. 향수를 칙 뿌리고 싱긋 웃는 여진일 보며 시목도 따라 웃었다. 그랬었다. 너무도 완벽한 밤이었다.

둘만의 날에, 오롯이 이 세상에 둘만이 존재한다고 느꼈던 깊은 밤이었고, 한시도 서로를 생각하지 않은 때가 없었던, 그런 하루였다. 벅차게 행복해 그것이 마지막으로 보냈던 우리의 기념일 일 줄은 꿈속에서도 상상하지 못했던 날이었다. 이렇게 아픈 생각이 제 머릿속으로 파고 드는 걸 보니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는 걸 시목은 잠결에도 알 수 있었다. 눈을 뜨고, 침대에서 일어나면 당신이 없는 우리의 결혼기념일이 시작될 것이다. 다음 결혼기념일엔 가까운 곳이라도 여행을 가자던 너는 나를 두고 어디로 간 건지,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의 토스트엔 뭐가 들었나 하고 졸린 눈을 비비며 침실에서 나오는 너는 어디 갔는지, 나를 보며 행복하게 웃어주던 너는 어디 있는지, 할 수만 있다면 여진이 있는 꿈속에서 영원을 살고 싶었다.

 

오전 7시. 알람이 울렸고, 하루를 시작해야만 했다. 여진이 곁에 없는 우리의 두 번째 결혼기념일을.

© 2019 by Soulmates Collabo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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