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선화에게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검은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 정호승, <수선화에게>
"이만 가볼게요, 볼 서류는 다 봤고 저희는 팀 사무실 꾸려지면 그 때 봬요."
탁자 위에 한가득 어지러진 서류들을 정리한 여진이 옷가지를 챙기며 일어섰다. 이 서류들과 함께 장장 한 달을 함께 뒹굴어야 한다. 특별사무실로 한 달 간의 장기출장을 생각하자 앞골이 뻐근하니 아파왔지만 그 장기출장 보다 더 신경 쓰이는, 눈앞을 캄캄하게 만드는 일이 있었다.
"아, 검사님은 괜찮아요. 아까 인사했으니까."
멋쩍게 웃어 보이는 여진에게 영과 호섭 또한 멋쩍은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괜찮다며 애써 손을 들고 웃어 보이며 그 사무실을 나섰다. 그러는 동안에, 그는 고맙게도 문을 열어본다든가 잘 가라는 한 마디 들려주지 않았다. 제 딴에는 배려였을 것이다. 그 사람은 늘 그랬으니까, 말을 삼가고 표정을 지우고, 행동을 없애고. 서류 읽기 전 간단한 브리핑 때조차 그랬다, 업무 차 만난 사람처럼 딱딱하게 통성명을 하고, 칼같이 수사 관련 브리핑을 하고, 예의 밥은 잘 먹고 다니죠? 하는 질문에 네, 하고 한 마디로 일갈하는 것이 그의 배려임을 모르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동안 어찌저찌 만나도 그럭저럭 괜찮았으니 그 사람과 함께 하는 시간 또한 버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같이 일을 하려니 그렇게 막막할 수가 없었다. 한 달짜리 짧은 공조라지만 신경이 여간 쓰이는 일이 아닐 것이다. 그 사람과 다시금 한 달 내내 마주보며 밥을 먹고, 일을 하고, 머리를 맞대고 서류를 읽을 생각을 하면 홧홧한 외로움이 올라옴과 함께 금방이라도 주저앉아 하느님을(사실 계시는지 안 계시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원망하고 싶었다. 제가 그 사람을 어떻게 피해다녔는데, 사방을 이리 막아두시고 어떻게 그러실 수 있어요.
세상 모든 것들은 극복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적어도 여진에게, 노력해서 극복되지 않는 것은 없었다. 한 차례의 대입 재수 경험이 그랬고, 두 번의 실연도 그러했고, 서른에 경감이라는 직위를 다는 것이 그랬다. 노력한 만큼 결과는 반드시 돌아왔다. 경찰대 입학에 성공했고, 웃으며 돌이킬 수 있는 연애가 되었으며, 노력을 인정받아 적어도 경찰 사회에서는 능력에 걸맞은 직위와 그에 상응하는 대우를 해주었다. 그러나 노력으로도 극복할 수 없는 것이 있음을 여진은 서른이 넘어서야 겨우 깨달았다, 이를테면 외로움 같은 것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잊힐 줄 알았다, 그 사람과 함께 쓰던 침대의 온기와 식탁을 채우던 두 벌의 수저, 두 벌의 밥그릇, 두 사람이 쓰기엔 조금 좁은가 하는 생각이 들던 소파와 쌍둥이처럼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두 벌의 칫솔들. 삼 년이라는 시간이 무색하게도 아침에 손을 뻗으면 느껴지는 침구의 싸늘함이라든가 한 벌의 수저와 한 벌의 식기가 만들어낸 공허함, 두 다리를 쭉 뻗고 누워도 넉넉한 소파와 바꿔줄 사람이 없어 삼 년 째 그대로인 고무가 살짝 닳은 칫솔 같은 것엔 도저히 적응할 수가 없었다. 극복해낼 재간이 없었다. 해서 여진은 집안의 모든 것을 짝수로 만들기 시작했다. 두 마리의 작은 거북이를 데려왔고, 두 마리의 구피와도 친구했고, 소파 위에 놓아두는 쿠션도 두 개, 인형은 네 개로 만들었다. 어떤 것들은 도저히 버릴 수가 없어 짝수인 것들도 있었다. 이를테면 함께 카모마일 차를 즐기던 찻잔, 널찍한 침대 베개, 밑창이 덜렁거려 하나 새로 사야지 했던 치수 큰 슬리퍼가 그랬다. 집안에 가득 들어찬 외로움을 비집고 들어가 그 안에 내 몸 하나 뉘일 도리가 없어 집으로 들어가는 날이 손을 꼽았다. 그렇게 머리검은독수리 마냥 집밖을 빙빙 맴돈 것이 삼 년이었다.
보통의 연애였다. 남들이 보기에 보통의 연인 같았다면 그러했을 것이고, 여진이 생각하기엔…평범하기도 했고 비범하기도 했다. 굳이 어느 쪽이냐 대답해야 한다면 비범한 쪽이 조금은 더 옳은 표현일 것이라고, 여진은 생각했다. 적어도 그들에겐 그 연애가 몹시나 특별했기 때문에. 일 년 여 간의 연애를 하며 외롭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이유는 딱히 알 수 없었다, 그저 준만큼 돌아오지 않는 사랑에 조금 지쳤나보다, 생각했을 뿐이다. 그 보통의 특별한 연애를 끝내고 마침내 결혼했을 때, 더 이상의 외로움은 없을 줄 알았다.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질 테니 외로움의 자리엔 사랑 혹은 따뜻한 충만함이 자리할 것이라는 상상을 했던 까닭이다. 웃긴게, 결혼하면 미안할게 더 많아지더라. 서류에 도장을 찍고 처음 만난 십 년 지기 동기에게 여진은 그렇게 말했다. 뭐가 그렇게 조심스러운지, 뭐가 그렇게 미안한게 많아지는지. 처음엔 다쳐서 미안해, 늦어서 미안해. 그러다가 같이 밥을 못 먹어서, 빨래가 늦어서, 아침에 인사를 하지 않아서. 그러다가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때, 더 이상 그 사람과 말을 하기 싫어질 때 미안해, 하고 있더라고. 뭐가 그렇게 미안한지. 검사님이랑 둘이 그 말을 그렇게 달고 살았다? 철저하게 외로워져 가던 날들이었다. 늘 외롭게 느껴졌던 그 사람도, 그 옆에서 외로움을 배워가던 여진도. 씁쓸하게 웃는데, 여진의 이야기를 가만 듣던 동기가 그랬다. 아직도 검사님, 그렇게 부르는거야? 호칭 정리 안 했어?
그 때 깨달았다, 우리는 딱 그 정도의 사이구나. 검사님, 경감님, 다섯발자국씩 떨어져 있는 사이, 손을 뻗으면 닿을 듯 한데 누구 하나 발을 내딛지 않으면 결코 다가갈 수 없는 그런 사이.
헤어지는 것이 당연한 그런 사이.
굳이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도록 방아쇠를 당긴 일을 찾자면…예상에 없던 유산이었을 것이다. 예정에 없던 임신을 했고, 몸 튼튼 마음 튼튼 서른두 살 경감 한여진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관할구역을 누비며 현장 골목골목을 달렸다. 가끔 생채기라도 나 미간을 내 천자(川)로 만든 시목이 말없이 연고를 발라줄 때면, 미안해요, 근데 하나도 안 아파, 나도 우리 미소도. 하며 씨익 웃어보이곤 했다. 아이가 떠난 것은 아차 하는 순간이었다. 찰나에 배를 가격 당했고, 순간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이 들었을 땐 침통한 얼굴의 동료들이 있었고, 그 때도 여진은 애써 미소 지었다. 괜찮아요, 손 잡아줄 그 사람 올 테니까. 그러나 퇴원하는 일주일 가까이 시목은 나타나지 않았고, 여진은 복도에서 들리는 발소리 하나하나에 매번 천국과 지옥을 넘나들었다. 너무나 외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병원을 떠나고도 차마 집으로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집에도 그 사람이 없으면 어떡하지, 정말 견딜 수 없이 외로워지면 어떡하지. 두려움에 여진은 당직실과 현장을 맴돌았고, 한 달 만에 집으로 돌아오던 날, 쇼파에 앉아 여진을 기다리던 시목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우리, 너무 외롭지 않나요. 시목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마지막 재판을 끝내고 법원을 나서면서, 여진은 시목에게 베개 맡에 두고 읽었던 시집을 주었다.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라고 쓰인, 표지더러 배경이라고 하기에 무색한 흰 색으로 칠해진 시집이었다. 자, 이혼 기념 선물.
"여기, 시를 보니까 외로우니까 사람이라는데, 그래서 많이들 위로 받았다고 하던데 나는 잘 모르겠더라고요. 사람이 아닌가봐."
"……."
"그래서 이건 선물. 왜 그런지 검사님이 읽고 알려줘봐요, 그래야 다시 올 기회에는 실수 안 하지 않겠어요?"
"……."
"실수는 우리끼리, 한 번이면 족하잖아."
볕이 참 좋은 어느 봄날, 그렇게 여진과 시목은 헤어졌다. 그리곤 별다를 것 없는 날들이었다. 그 사람이기에 외로운 줄 알았는데, 그래서 그 사람 떠나면 홀가분해질 줄 알았는데 꼭 그런 것도 아니었다. 다시 봄이 찾아오고, 또 계절이 지나 봄이 찾아와도 공허함은 가실 줄 몰랐다.
*
구피야, 너네 구(舊)아빠는 어쩜 그렇게 멀쩡해보이니? 한 삼 년쯤 같이 살아도 봤는데, 나는 정말 모르겠다. 자, 여기 밥. 배고팠지, 많이 먹어. 그 사람도 외로움이라는걸 알까? 역시 사짜들은 좀 다른 것 같아. 이럴 땐 좀 부럽네, 얄밉기도 하고. 천천히 먹어 구삐야. 그런데, 아깐 느낌이 또 묘하더라, 이상하게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어. 헤어지고 여러번 인사도 했고, 밥도 먹었고, 차도 마셔봤는데, 그냥 친구처럼 지내기로 했잖아, 그래서 예전에 하던거 괜찮은 척 여러 번 했고, 그래서 이젠 무뎌진 줄 알았는데, 마음이 참 이상했다? 웃기지?
*
회의를 하고, 검거에 나서면서도 참 목석같이 굴었다, 그 사람. 그 긴 수사과정을 지휘하면서 얼굴에 표정 한 번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때때로 낯설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누군가와 적절히 대화도 나누며 밥을 먹는게 이상하게도 신경이 쓰이더랬다. 참 아무렇지 않게 잘 지내는구나 싶어 밉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불안하다가, 밉다가 또 신경쓰였다가, 놀라웠다가. 그 사람은 늘 거기, 그 자리였는데 파도처럼 매일 그 사람에게 밀려들었다가 멀찍이 도망치는 날들이었다. 첫 눈이 내릴 즈음 한 달을 예상하며 시작된 수사는 의도치 않은 난항을 겪으며 두 달 째에 접어들고 있었다. 섬처럼 단단해 보이는 시목처럼 여진도 또한 의연하게, 아무렇지 않은 듯이 보이기 위해 애를 쓰는 날들이 이어졌다. 영과 호섭은 그런 두 사람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하다가 조금씩 적응을 하다가, 알아서 두 사람의 보이지 않는 감정선에서 줄타기를 할 줄 아는 경지에 이르렀다. 괜히 저희 때문에, 죄송해요. 시목과 여진의 열 글자로 밥을 지어먹을 수 있다면 벌써 쌀 한 말은 족히 되었을 것이라고 영과 호섭은 종종 생각했다.
어느 날엔가, 영과 단 둘이 밥을 먹게 된 날이 있었다. 사무실을 지키기 위해 남겨진 여진은 영이 먹고 싶다던 순대국밥을 시켜놓고 고사를 지내는 것처럼 밥알을 세며 한참을 들여다보기만 했다. 이럴 줄 알고 애써 먹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 사람이 생각나는 일은 어쩔 수가 없다. 허여멀건 국물이 꼭 말간 얼굴의 그 사람을 닮아있었다. 새우젓을 넣고 좋아하지 않는 다데기와 들깨가루를 우정 넣어가며 국물이 발갛게 물들기를 기다렸다. 그래도 자꾸 떠오르는 생각들은 멈출 수가 없었는지, 국물을 호로록 삼킨 여진이 짐짓 웃어보이며 영에게 물었다.
"검사님, 요즘에도 국밥 잘 먹죠?
"네. 식사하러 요 밑에 있는 국밥집 자주 가세요."
"수타짜장면집 가서도 짬뽕 먹는다고 그러고요?"
"그럼요. 가끔 볶음밥도 시키세요."
"지검 앞 포장마차에서는 꼭 우동에 물 타서 먹고."
"네."
"그래야 황시목이지."
여진이 배부른 고양이처럼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래, 그렇게 혼자서도 잘 지내고 있어야 내가 아는 황시목이지.
"그래도 외로워보이실 때 많아요. 어깨도 이렇게 축 쳐져서."
영이 안 그래도 작고 둥근 어깨를 옹송거리며 축 쳐진 어깨로 걷는 그 사람의 모습을 흉내냈다. 대충봐도 생각나는 그 실루엣에 웃음이 터진 여진이 파안대소 하며 손을 절레절레 저었다.
"아닐걸요, 나 아플 때도 한 번 안 왔던 사람인데. 혼자서도 어련히 알아서 잘 지내실까."
"네? 아닌데. 그 날 연락 받자마자 뛰쳐나가셨어요, 신발도 짝짝이로, 한 쪽은 슬리퍼, 한 쪽은 구두. 오죽하면 저희가 택시 잡아드린다고 했었는데."
"…네?"
"검사님, 그렇게 정신없어 보이시는거 처음 봤어요. 무슨 일이라도 날까봐 저희가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아시잖아요, 검사님 매사에 신중하시고 표정도 없으신데, 돌부처같이."
"……."
"그 날 처음 봤어요, 검사님 우시는거."
"……."
*
구피야, 그 사람이 울었대.
그 사람이, 그 날,
나한테 왔었대…….
*
돌이켜보면 그 사람을 피해다녔던 것 같다고, 막다른 길에서 그 사람을 마주하기 전까지는 그랬던 것 같다고, 여진은 생각했다. 일부러 피한 것은 아니었다. 가능한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은 했었으나 마주한다손 치더라도 억지웃음을 지어보이며 등을 돌리고, 얼굴을 외면하며, 그 사람에게서 멀어지려 하지는 않았었다, 적어도 진실을 알게 된 그 날 전까지는. 그런데 이상하게, 그 날 이후로 여진은 그를 피해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상하게도 여진은 그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팀원들이 회식을 하러 갈 때도 문서 작업을 핑계 삼아 사무실에 남아있었고, 저녁엔 애꿎은 밑집 동생을, 또 어떤 날엔 팽팽 잘 돌아가는 머리가 아프다며 미안, 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렇게 장장 이 주를 꼬리잡기 하듯 피해다니면서 생각했다, 왜 그를 마주할 수 없어? 열 손가락을 모두 세어가며 이런 저런 이유를 따져보았는데도 명확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범인 검거를 위해 청파동 골목골목을 누비며 뛰는 순간에도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찰나에 발을 헛디뎌 팔꿈치가 까지고 무릎에 멍이 들면서도 그 사람에게서 멀어지려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사필귀정이라고, 범인 검거부터 수사 종료까지 모두 마치고 사무실에서 짐을 빼며 수사팀을 나서는 날, 멀찍이서 시목의 목소리가 여진을 불러세웠다. 경감님, 괜찮으시면 같이 식사하실래요? 이상하게도 그 목소리가 떨리는 것 같았다. 기분 탓이라고, 의도치 않게 가슴이 뛰어서 그런 것이라고, 여진은 생각했다.
특별수사팀으로 발령 예정이었던 임형사는 갑작스런 부상으로, 임형사 대신 들어갈 예정이었던 장형사는 인사개편으로. 어쩔 수 없는 발령으로 시목과 한 팀을 이루게 되었고, 그 떨리는 목소리에 어쩔 수 없이 밥을 먹게 되었고, 차를 두고 왔던 까닭에 어쩔 수 없이 같은 차를 타게 된 여진은 애써 안절부절 하지 않기 위해 말을 고르고 또 고르기에 여념이 없었다. 체에 걸러 말을 줄이고 망에 걸러 웃음을 담았다. 그러나 오랜만에 들어간 술은 체의 구멍을 주먹만하게 늘려놓았고, 어쩔 수 없이 여진의 말은 늘어가기 시작했다. 테이블에 놓인 술병이 서너병 쯤 되던 때인가, 말짱한 정신으로 여진이 그랬다. 그 날 왜 밖에 서 있었어요….
"왜…나 잠들 때만 왔어요? 나는, 검사님이 너무 보고싶었는데…."
"……."
"나 너무 힘들다고, 너무 슬프다고, 나…좀 안아달라고 하고 싶었는데."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물어오는 여진에게, 순간 시목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참 무서운 사람이다, 이 사람 앞에선 어떤 거짓말도 할 수가 없다고, 어쩔 수가 없다고.
"무서웠습니다. 밤에 연락을 받았는데, 경감님 다치셨다고…. 그렇게 연락을 받았는데, 그 때 처음 알았습니다, 눈앞이 깜깜해진다는 말. 정말, 눈에 보이는게 없어서 어떻게 운전을 해서 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땐, 그저 경감님 얼굴을 보고싶단 생각밖에 없었어요. 더듬더듬 물어 병실을 찾아서, 차마 들어갈 용기는 내지 못하고 그렇게 겨우 병실 앞에 붙어있는데, 의사선생님께서 나오셨어요. 경감님은 괜찮은데 우리 미소…. 그렇게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상하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무섭죠?"
"……."
"너무 무서웠습니다, 저는…. 우리 아이가 그렇게 갔다는데, 단지 경감님이 무사하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안도의 마음이 드는게, 제 자신이 무서워졌어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내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두려움이 밀려와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경감님도, 먼저 가버린 우리 아이도 볼 수가 없었어요, 볼 낯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반나절을 병원 복도에서 서성이는데, 아이의 마지막이라고…. 한번 안아주는데, 눈물이 나질 않았어요, 내 아인데, 눈 한번 떠보지 못한 내 아이의 마지막인데……. 그 때 결심했어요, 경감님과 멀어져야겠다고, 나는 너무 무서운 사람이라고."
너무 이기적이었습니다, 지금도…. 죄송합니다, 미안해요. 그 말을 하는 시목의 얼굴은 참으로 일그러져있었다, 뭐가 그리 고통스러운지, 그리 괴로운지. 어째서 늘 끝인사는 미안하다는 네 글자여야 하는지. 그제야 여진이 허탈하게 웃었다.
"우린 뭐가 그렇게 미안할까요. 그냥, 그냥 그 때 바로 이야기 했으면 되는데. 섭섭하다고, 나 너무 무서웠다고, 그러나 당신이 있어 다행이라고…. 그 때 이야기 했으면 됐을텐데."
"……."
"나, 너무 외로워요."
너무 힘들어.
*
이상하리만큼 춥지 않던 겨울이 가고 봄은 이르게 찾아왔다. 오는 새도 모르게 찾아온 봄이었다. 그 틈을 따라 공조는 끝이 났고, 시목과 여진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매일을 살았다. 정신차리며 따라가기에도 벅찬 일상이었다.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도록 달려야 하는 매일이었던 까닭이다. 여느 때처럼 범인을 쫓기에 바쁜 강력반 일상을 살고 있는데, 꽃은 폈고, 봄바람은 불었고, 도장을 찍은 지 삼년이 됐고. 범인을 잡으러 뛰어다니는데, 그런 이상한 생각들이 들었다. 꽃이 피고 바람이 부는 것처럼 도장을 찍었던 그 날도 계절처럼 무뎌지겠구나. 그리고 그 순간, 눈앞이 기우뚱하며 세상이 까무룩해졌다. 조금은 아팠던 것 같기도 하다고 여진은 생각했다.
온몸을 짓누르는 듯한 통증과 옷차람이 한결 가벼워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여진이 무거운 눈꺼풀을 애써 밀어올렸다. 흐릿한 시야에 멀겋게 생긴 누군가가 들어왔다. 뿌옇긴 해도 고저 없는 표정이 그 사람이다. 괜찮으십니까? 정신이 드세요? 답지 않게 빠른 목소리로 묻는 시목에게 여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데. 힘이 들어가지 않는 입으로 혀를 굴리니 갈라진 목소리가 목구멍을 비집고 나왔다.
"아뇨, 괜찮지 않을 때도 있는 겁니다. 그렇게 누워 계신지 벌써 반나절이에요."
"진짜로 괜찮은데…. 여기, 병원인가보네. 번거롭게 해서 미안해요."
여진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느릿하게 말했다. 손발을 까딱거릴 힘조차 없어서 흐릿하게 미소짓는 것밖엔 방법이 없었다. 순간, 버럭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여진은 지금 저가 꽤나 아프구나, 생각했다. 황시목이, 그 돌부처 같던 천하의 황시목이 화를 내고 있다….
"뭐가 그렇게 미안하세요? 왜 경감님이 미안하세요, 미안해야 할 사람은 따로 있는데?"
"검사님, 지금 화내는 거에요?"
"……."
그냥 웃음이 났다, 왜 웃음이 나냐고 물으면 그냥 웃음이 났다고, 그렇게밖에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서로의 모습에 화를 내기엔 너무나 멀어져버린 사이였다. 분명, 그 사람도 알고 있을텐데, 소용없음을 알고 있을 텐데도 소리를 질렀던 것이다.
"우리, 헤어진 지도 벌써 삼 년이야. 시간 진짜 빠르죠? 그만큼 우리가 서로에게 두어야 할 거리도 멀어졌다는거 아닐까요."
"다행입니다, 경감님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서. 저는 너무 더뎠는데…."
"……."
순간, 그 사람의 눈이 깊어져 여진은 당황스러웠다. 거리를 두겠다고, 한 발짝 멀어지려 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그 사람은 두 걸음을 다가와 여진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몇 년을 보아도 참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 그 불확실함에 가슴이 뛰는 것이라고 여진은 생각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이니까, 당황하는게 당연하니까, 길가에 툭 튀어나온 돌부리에 걸려 놀란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
"시간이 지나면 멀어질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진다는 말을 믿었으니까요. 논리적으로 그럴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잘 모르겠습니다. 살아보니까 가까이 있어도 눈에서 멀어지는데, 눈에서 멀어졌다고 해서 마음에서 멀어지는건 아닌 것 같더라고요."
계절없는 시목이 여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여진은 계절없는 사람이 하는 뚜렷한 색깔의 말들에 어떻게 답을 해야 하는지 몰라 안절부절 하고 있었다. 멍하니,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전에, 저한테 그러셨죠? 외로우니까 사람인데 그 이유를 모르겠다고."
"그걸 정말 생각했어요?"
"했습니다, 경감님이 물어본 질문이니까."
시목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한결같은 사람이었다, 저 흔들리지 않는 단단함을 좋아했는지도 모르겠다, 여진은 순간 생각했다. 아름드리처럼 곧고 단단한 사람. 그래서 늘 그 자리에 있을 사람. 수많은 숲을 헤매고 수많은 나무들을 거치더라도 결국엔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는 그 사람.
"솔직히, 잘은 모르겠습니다. 그 시에서 그러죠,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린다고,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고.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하느님도 본인께서 외로운 이유는 잘 모르실거에요, 산 그림자도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한 가지는 맞는 것 같습니다. 사랑해서. 사랑하니까."
사랑해서 외로웠어요. 그 말을 하는 시목의 목소리가 바람에 이는 잎새처럼 파르르 했다.
"늘 주고 싶은 마음은 산처럼 큰데, 사랑을 주고나면 견딜 수 없이 외롭고, 사랑을 받고나면 견딜만큼 외롭고, 외로워서 미안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경감님을 더 행복하게, 더 사랑해줄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였구나. 사랑해서 외로웠네, 사랑해서 미안했고."
"……."
"참 바보같다, 그쵸? 그 때 그렇게 이야기 했으면 될 걸, 뭐가 그렇게 대단한 사랑을 했다고 그렇게 서로 체면 차리고, 그랬을까?"
"그래도 그 때든 지금이든, 변하지 않는게 하나는 있었습니다."
"그게 뭔데요?"
말을 잘 듣지 않는 몸을 애써 시목이 앉아있는 쪽으로 틀어가며 여진이 눈을 반짝였다.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여진의 팔을 잡았던 시목이 주춤하며 손을 옹송그렸다. 꼭 고사리처럼, 아직도 그러네. 한결같은 시목의 모습에 여진이 작게 웃었다.
"한여진이라는 사람은 스스로가 얼마나 귀한 사람인지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가족들에게, 친구들에게, 동료들에게, 또…언젠가 나타날지 모르는 새로운 사랑, 그리고 제게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사람인지, 꼭 알아야 해요."
그 때 여진은 그런 생각을 했다, 내 아픔에, 내 외로움에 함께 가슴 아파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가치있는 삶인가. 하느님도 어쩔 수 없다는 그 외로움을 나눠지려는 저 사람은 얼마나 사랑스러운 사람인가. 여진은 어쩔 도리 없이 시목에게 대뜸 물었다.
"모레, 나 퇴원할 때 올래요?"
"네?"
"밥, 같이 먹자구. 점심에 바빠요?"
"아…."
"나, 지금 굉장히 무안하고 부끄럽지만 얼굴에 딱 철판 깔구 체면 다 버려가면서 이야기 하는거에요."
"바쁘지 않을 예정입니다."
바빠도 바쁘지 않을겁니다. 그런데 모레에 퇴원하셔도 괜찮으시겠어요? 더 있어야 하는거 아닙니까? 정색하고 물어오는 시목에게 됐다며 손사레 치며 여진이 파하하, 소리내서 웃었다. 그렇게 쉽게 다칠 사람 아니에요, 나.
"그리고 갈대숲에 있다던 가슴검은도요새 말입니다, 그 시에서."
"네."
"그거 접니다."
"네?"
"그 새처럼, 항상 경감님 지켜보고 있다고요. 그러니까 다치지도 말고, 아프지도 마세요."
못 본 사이에 농담이 늘었네? 그런건 어디서 배웠어요? 개구진 표정을 짓는 여진에게 시목이 여우같은 얼굴로 대답했다. 늘 그랬습니다.
“궁금한게 하나 있는데요, 검사님.”
“네.”
“우리, 언제까지 이렇게 경감님, 검사님, 할거에요?”
슬슬 다르게 불러볼 때가 되지 않았나 싶어서. 데록데록 눈을 굴리는 여진을 보며 시목이 작게 웃었다. 좋으실 대로 하세요, 여진씨. 내 이름이 이렇게 낯간지러웠나 싶어 여진이 질끈 눈을 감고 웃었다. 엄청 어색한데, 기분은 꽤 좋네.
며칠 전 꽃집 앞을 지나가며 보았던 수선화 화분을, 여진은 떠올렸다. 그 연약한 꽃대에서 틔워올린 연노란 꽃이 어찌나 외로워보이던지, 발길을 멈추고 그 화분 앞에 옹송그려 한참을 앉아있었더랬다. 인간처럼 약하디 약한 꽃대에서 피어난 연노랑의 꽃잎은 외로움의 빛깔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연한 미소는 꼭 연노랑 수선화 꽃을 닮아 있었다. 그래, 외로우니까 사람이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쯤은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다고. 그 끝이 어떤 모습일지 지금은 비록 알 수 없어도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하고 있는 오늘,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그렇게 봄볕이 깃든 여진의 나무에 연노란 꽃이 피는 날들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