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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콘과 담배와 한경감

황장국 @gongdukhaejang

[검사님, 왜 그렇게 봐?]

시목은 말문이 막혔다. 처음 시각을 얻은 사람처럼 눈을 깜빡이자 여진은 살며시 손바닥을 앞에 흔들어 보이곤 해사한 웃음을 짓는다.

[뭐야. 내가 너무 근사했나봐.]

여진이 선 자리에서 한 바퀴를 휙 돈다. 긴 치맛자락이 넉넉하게 퍼지더니 그녀의 다리를 감았다. 얄쌍한 복숭아 뼈 어귀에서 하늘대는, 얇고 푸른 천에 시목은 시선이 뺏겼다.

[경감님,]
[응?]

간신히 입을 열어 부른다. 여진이 고개를 들었다.

시목은 그를 품에 안았다.

 

봄날이었다.

 

 

연애 초반엔 깨가 쏟아진다는 말이 왜 생겨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왜 하필 ‘깨’인지 시목은 의문스러웠다- 분명 무언가가 와르르, 우수수, 화드드득 떨어져 내리는 느낌이 온 천지에 가득했다. 그가 가는 걸음걸음 마다 배꽃이 만개하고 나뭇가지를 흔드는 청아한 바람과 함께 내려온 꽃잎들이 공중에 뜬 화관처럼 머리 위를 맴도는 날들이 이어졌다. 이게 지나치게 화려하고 로맨틱하기만 한 표현처럼 들린다면, 다른 표현으로는, 가벼운 신발을 신고 들판과 강변을 산책하는 것 같았다. 사랑이나 행복 같은 말들은 그가 평생 써먹을 일 없을 고대 희랍어사전과 다를 바가 없으니 감정을 시각화하여 말하거나 행동으로 전달하는 노선을 줄곧 택해왔다. 운 좋게도 그걸 거슬려하지 않는 한경감을 만났다. 그리고 두 집을 오가며 몇 계절을 같이 보내고 나니 당연한 수순처럼 집이 합쳐졌다. 동거에는 어려울 게 없었다. 동거는

[내가 가고 싶은 카페가 언덕 위에 있더라. 그래서 그 언덕을 올라간 거야. 그렇게 동거한 거라고.]

한경감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랬다.

그래서 둘은 508동 1002호에 있는 카페에 가기 위해 래미안의 엘리베이터를 탔다. 노량진 전세가 마침 끝나가던 차였고 여진이 원한 대로였다. 여진이 정착기를 가지며 며칠 식탁에 앉아 차를 마시고 시목과 함께 잠을 자고, 저녁밥을 해먹다 보니 살림이 생겨났다. 석상처럼 쌓아놓기만 한 시목의 법학 도서들 위에는 피규어들이 당당하게 올라섰다. 만화책과 크로키북은 무의미하게 비워져 있던 책장에 척척 들어갔다. 퇴근한 시목이 화장실에 들어가면 여진의 샤워젤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아침에 먼저 일어난 한경감이 화장실로 들어가면, 시목은 이불속에 누워서 여진의 노래를 들었다. 여진은 물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늘 똑같은 노래를 불렀다. 밤에는 여진이 가져온 전자레인지에서 팝콘 튀겨지는 소리가 일상적으로 들려왔다. 조용하고 가끔 소란스러운 집이다. 허기질 땐 계란과 고구마를 삶고, 수영장을 다녀온 여진에게 시목이 베이컨을 듬뿍 넣은 토스트를 구워 제로 콜라 한잔과 함께 입에 물려주는 삶이었다. 사계절은 지구와 함께 쳇바퀴를 돌았다. 세 번 째 겨울이 끝나가고 있었다.

 

이제 인정할 때가 온 것 같다.

“무슨 소리야. 결혼하고 싶다는 걸 인정해?”

원철은 두 말 사이에 인과를 찾지 못하겠다는 듯 사뭇 당혹스러운 얼굴이었다. 검사장직을 사임한 원철은 모교 로스쿨 교수 자리에 앉았고, 시목은 가끔 그를 보러 관악산으로 향했지만 오늘은 원철이 공덕으로 왔다. 늘 먹던 짬뽕국물과 볶음밥이 먹고 싶다나, 그래서 시목은 짜장면과 볶음밥을 놓고 원철과 마주앉아 조신하게 젓가락으로 단무지를 집어 먹는다.

“예. 결혼이 하고 싶어졌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걸 거창하게 인정까지 해? 그냥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네 마음인데.”

말을 잇던 원철이 문득 입을 다문다.

“그래. 뭐. 넌 그럴 수도 있겠다.”

시목은 우물우물 단무지를 씹어 삼키고 자스민 차를 홀짝인다.

“근데 왜 결혼이 하고 싶냐 너는?”
“그러게요.”
“뭐가 그러게요야, 웃기고 있어.”

원철은 허탈하게 웃음을 터뜨린다. 시목은 단무지를 툭 던져놓고 볶음밥을 몇 술 넉넉하게 떠먹는 원철을 가만히 응시한다. 그 시선에 눈을 맞춘 남자는 마주보다가, 손가락으로 안경을 쓱 밀어올리고 의자에 몸을 기댄다.

“어디보자……. 사랑하고, 같이 있고 싶고, 안착하고 싶고, 그런 거 아니겠니?”
“하지만 헤어질 수도 있죠.”
“야, 그걸 누가 모르냐? 다 알면서 하는 거지,”

원철이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시목은 짜장면 그릇에 꽂아놓은 젓가락 끄트머리를 말없이 보고 있었다.
제 후배의 단정한 옆얼굴을 흘기다가 태연하게 짬뽕 국물을 들이킨다.

“무모하고 멍청하지만, 그래도 하는 거야. 인간이 다 그래. 뭐 너는 인간 아니냐?”
“인간입니다….”
“그래! 부질없을 거 알면서도 한 장의 종이로 이 관계를 묶어놓고 싶고, 그저 말 뿐이더라도 정말 이 사람과 영원하길 바라는 인간인거야. 너도.”

시목은 답이 없더니 젓가락을 슬며시 쥐어든다. 면을 천천히 비비며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바람에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이거 고민하느라 안 먹는 거냐? 내가 먹는다?” 시목이 그제야 시동을 건다. 원철은 잘 먹는지 잠자코 확인하곤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어딘가에서 문 열리는 종소리가 나고 조용하던 빈자리에 새로운 손님들이 들어온다. 조용한 테이블 옆에 와글와글한 소리가 스쳐지나간다.

“야 근데.”
“예,”

웅얼대면서도 잽싸게 답하는 시목. 자스민차를 마시며 찻잔 너머로 의뭉스런 기류를 쏘아내는 원철. 차를 내려놓고, 냅킨을 집어 들고, 맞은편의 곱슬머리를 마뜩찮게 응시했다. 시목은 제 앞으로 내밀어진 냅킨 몇 장에 꾸벅 감사를 표하고 가볍게 입가를 닦는다. 다시 찻잔을 만지작대는 원철은 의미심장하게 목을 가다듬었다.

“대체 너의 그 귀하신 분이 누구신진 왜 안 알려 주냐? 몇 년째야 지금,”
“아, 제가 말씀 안 드렸습니까? 한여진 경감님입니다.”
“뭐?!!!!”

찻잔이 흘러넘친다. 시목은 놀란 토끼 눈으로 쳐다보더니 냅킨을 도로 건넸다. 원철은 받지도 않고 도무지 납득할 수 없다는 듯,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너 이자식이 진짜, 경감님을?!!!”
“예…, 한경감님인… 아니, 닦으셔야-”
“아니, 와, 아니, 정말로, 경감님이?!!! 너를?!?!”

당황한 시목이 곧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짜장면 그릇을 다 비울 때 까지, 마주앉은 자리에선 탄식과 환호가 끊이질 않았다.

원철은 시목에게 계산을 시키며 청첩장은 미리 받은 셈 친다고 말했으나, 제대로 듣지 못한 시목은 그저 고분고분 카드를 종업원에게 내밀었다.

 

 

집으로 돌아오던 시목은 그날 저녁 이마트에 들러 평소대로 그들의 대화내용을 참고해 장을 봤다. 마침 여진과 쓰던 초록색 장바구니 끄트머리가 헤져서 새로 살 계획이었다. 고민하다 청록색을 골랐다. 손바닥만 한 장바구니를 카트 안에 던져놓고 주말 저녁의 마트를 홀로 유영했다. 맥주로는 여진이 좋아하는 것을 네 개 골랐다. 어차피 시목은 맥주에 관해선 특별한 취향이 없으니, 여진에게 일방적으로 맞추는 것을 택해왔다.

[근데 너 중요한 걸 빼먹었어.]

유제품 코너 앞에 선 시목. 시원한 냉장고 기운을 느끼며 작은 우유를 골라 넣는다.

[경감님의 생각 말이야. 상대는 생각도 안하는데 너만 피터지게 고민하는 거면 뭐해.]
[아, 네.]
[그리고, 결혼 얘기한다고 도망갈 사람인지는 네가 더 잘 알겠지 않겠어?]

시식코너를 지나는 시목과 마주친 직원은 살가운 눈인사를 건네고, 그는 건네받은 해쉬 브라운 조각을 곱씹다가 한 팩을 받아들었다.

[오늘 가서 물어봐.]

주변을 둘러본 시목은, 옅은 한숨을 쉬며 계산대로 향했다.

 

 

“나 왔어 검사님-”

명랑한 목소리와 함께 파란 양말에 잔뜩 고단함을 묻힌 여진이 타박타박 들어왔다. 주방 식탁에 앉아 책을 읽는 시목의 머리를 쓰다듬고 볼에 쪽 입을 맞추고 안방으로 들어가는 게 그녀의 패턴이다. 시목은 집에 온 이후로 종일 책과 함께 앉아있었다. 사뭇 뻐근해진 목을 풀어주고 의자에 기대니 커튼 너머의 서울에 밤이 도래해있다. 반쯤 열린 드레스룸 문 너머에서는 여진이 분주하게 좌우로 오간다. 화장실에서 잠깐 물소리가 났고, 점퍼와 머플러를 벗어던진 한경감이 반팔 차림으로 나왔다.

“검사님, 잘 있었어?”
“응.”
“밥은?”
“아직요.”
“시간이 몇 신데 아직이야,”

입술을 부루퉁 내밀곤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컵에 따라 마시는 여진. 시목은 앉은 채 눈으로 모습을 좇는다. 여진은 건너편에 드르륵 의자를 꺼내고 철썩 주저앉는다.

“검사님. 나가서 뭐 맛있는 거 먹을까? 치즈곱창 어때?”

시목은 말없이 어깨를 으쓱이곤, 쥐고 있던 펜을 손끝으로 도르르 굴린다.

“야채곱창.”
“치즈곱창.”
“야채곱창.”
“아 왜 진짜.”
“지금 치즈 들어간 거 먹으면 속 부대끼잖아요. 잠도 잘 못 잘 거고.”
“에이… 그거나 그거나…….”

시목은 눈을 천천히 깜빡였지만, 내 예상이 맞을 거라는 확신과 여유가 가득한 시선이라 여진의 매서운 눈빛이 곧 흐트러졌다.
입술에서 한숨이 포로록 새어나온다.

“알았어. 대신! 나 오늘은 술 마실 거야.”
“그래요.”
“나 드러누워도 업고 올 수 있지? 좋아, 그럼 됐어.”

여진은 명쾌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다가와 몸을 숙여오는 시목과 짧게 입을 맞춘다. 시목은 얇은 점퍼를 주워들었다. 손에 집히는 대로 시목의 바람막이를 꺼내 걸친 여진은 슬리퍼를 신고 터벅터벅 문을 나섰다.

 

 

한바탕의 식사가 끝나갈 무렵, 두 사람은 주전자에 담긴 보리차를 마신다. 배가 고팠던 두 사람 덕분에 수북했던 야채곱창은 게 눈 감추듯 사라져버렸다. 시목은 틈틈이 여진의 잔을 채워주면서 그녀의 손가락, 눈과 입매를 스치듯 확인했다. 테이블 빈 곳에는 여진이 비운 맥주 두 병과 시목의 사이다 한 캔이 오도카니 올라와있다.

“나 내일 늦어, 친구 만나요.”
“응,”

야채가 눌어붙지 않게 뒤적이며 답하는 시목. 여진은 제 몸에 다소 큰 바람막이의 주머니에 손을 푹 집어넣은 채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를 멍하게 본다. 불을 끄자, 연기는 산들바람처럼 주춤해진다.

“아니 근데, 걔가”
“응,”

운을 뗀 여진은 말없이 입만 열고 있다가, 꾹 다문다. 시목은 그녀의 표정을 스캔한다.

“걔가 자꾸 검사님을 만나고 싶어 해. 국수는 언제 먹여 줄 생각이냐… 나는 설렁탕도 좋다… 어쩌고저쩌고”
“음, 근데?”
“‘근데’라니?”

여진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얼씨구. 무슨 말인지 모르는 거야, 아님 모르는 척이야?”

시목은 답 대신 집게를 내려놓았고, 젓가락으로 어설프게 손을 옮긴다. 주시하던 여진은 단발머리를 습관적으로 빗어 넘기고 공연히 옆 테이블에 삐죽 올라온 티슈를 보다가, 슬금슬금, 시목의 얄쌍한 눈매를 살핀다. 여진이 먼저 답답함에 못 이겨 말을 이을 때 까지 기다리는 편을 택한 듯 시목은 의미 없는 젓가락질을 하다가 차를 마셨다. 마주치는 시선. 쯥, 혀를 차는 여진.

“아무튼, 그래서 난. 네가 계속 그런 실없는 소리 할 거면 내 황검사님 그림자도 볼 일 없을 거라고 했어.”

내 황검사님, 시목은 설핏 웃음이 나온다. 여진은 눈이 동그래졌다.

“왜 웃어?”
“그냥요.”
“웃는 건 보험광고 같아선.”

한숨짓지만 그녀도 웃는 낯이 얼굴에 걸려버린다.

“아니… 검사님, 봐바. 우리가 결혼하려고 만난 사이는 아니었잖아? 그치?”
“뭐, 모든 연인이 꼭 결혼하려고 연애하진 않듯이.”
“그리고 자기 솔직히, 결혼 생각 없잖아? 내가 알기론… 그랬는데?”

시목은 사이다를 들이키고 결연하게 내려놓았다. 상큼하고 털털한 탄산이 우수수 목 안에 떨어져 내리고 그가 공연히 마른침을 삼켰다. 여진의 얼굴 근처만 맴돌던 시선이 마침내 동그란 두 눈과 마주한다.

“없었어요.”

그를 낯설게 바라보는 여진.

“뭐야, 왜 과거형이야.”

그녀의 말과 함께 다시 허공으로 가 버린 시목의 단정한 눈매는, 얼마간의 정적을 유지하더니 다시 여진에게로 돌아왔다.

“왜라니. 살다보면 생각도 바뀌고 그러는 건데.”

지금 시목은 아주 당연한 말을 던져놓고, 더 물을 것이 있냐는 말간 눈빛으로 여진의 의심 가득한 시선을 받아낼 참이다. 그게 먹히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당장 그 말곤 떠오르는 묘책이 없다. 사실 한경감에 대한 거라면 아직 모든 게
어렵다. 여진은 입술을 말아 문 채, 눈을 굴린다. 나무 탁자에 사탕이 굴러가듯 도르륵 소리가 날 것 같은 눈. 시목은 저의 시선을 떼어내고 하릴없이 맥주병을 쥐어들지만 더 따를 것도 없다는 걸 깨달아버리곤 끙, 소리를 내며 제자리에 옮긴다. 여진이 키득거린다.

“검사님,”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달큰하게 부른다.

“황시목, 나랑 결혼하고 싶어?”

시목이 애매한 힘으로 붙잡고 있어 기우뚱해지는 유리병.
남자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병을 안전하게 놓는다. 불투명한 술잔을 보고 냅킨을 꺼내고 입술을 닦고 수저를 그릇에서 탁자로 내려놓곤 다시 원위치로.
뭐든 이미 들통 난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시목은 말을 흘린다.

“어차피 말 뿐인걸요.”

그가 한경감의 얼굴을 다시 보기 전까지 숨 막히도록 짧은 침묵이 지나갔다.

“이런 식으로 결혼을 얘기하는 건 별 의미 없잖아요.”
“이런 식이 뭔데? 가볍게?”
“뭐……. 응.”
“왜요 그럼 늘 무겁게 분위기 잡고 논의해야 돼? 이거 청혼 아니잖아.”
“아니, 아니죠. 그럴 리가.”

대강 얼버무리고 고개를 숙인다. 여진은 의자를 두 손으로 짚은 채, 시목을 향해 몸을 조금 기울이곤 동그랗게 웃고 있다. 시목의 얼굴이 뜨거워져서 차가운 사이다를 들이킨다.

“자기 얼굴 빨개졌어.”
“다 먹었으면 가죠.”
“이그그, 말 돌리는 것 봐.”

손을 불쑥 뻗더니 시목의 머리칼을 마구 흩트리는 여진. 시목은 눈앞에서 흔들리는 얄쌍한 손목을 보고 있다가 잡고 내려놓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계산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난 한경감은 팔랑팔랑 시목의 등 뒤로 사라졌다. 그는 숨을 한번 크게 내쉰다. 주변을 머쓱하게 둘러보고 일어난다.

바깥에 선 여진이 꼬나문 담배에 불을 붙여주고 서 있으면서도 시목의 눈은 갈 곳을 잃은 듯 흔들렸다. 한경감은 그의 팔을 툭 치곤, 손가락을 얽어 깍지를 꼈다. 흔들리는 잎처럼 가느다랗게 호흡하던 시목이 그녀의 손만 꼭 잡았다.


거리의 그늘에 핀 덤불에 노란 점들이 알알이 비추는 계절이 왔다.

“검사님. 숨 그만 참고, 말해도 돼.”

목소리가 봄바람처럼 스치자, 내리깐 눈을 다시 뜨는 시목. 여진의 지시대로 호흡을 가다듬는다.

“내가 결혼 얘기를 꺼내도,”

더불어 무게가 실리는 여진의 시선을 느끼면서 시목은 힘주어 생각을 입에 올린다.

“한경감님이 당장 도망가지는 않을 거라고 약속해줄 수 있어요?”

배회하다 그녀에게로 정착하는 시선을, 엉겁결에 붙잡는 여진.

“내가 도망을 가?! 그럴 사람으로 보였단 말이야?!”
“그건 아니지만 내 말은…”

시목의 애처로운 눈빛과 마주치자 여진은 머릿속이 멈췄다. 바람에 쓸린 낙엽처럼 휙 생각들이 비워진다. 그런데, 그 바람이 허파에도 들었는지 갑자기 웃음이 나서 여진은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뱉고 소리 내어 푸하하 웃었다. 그걸 보는 시목.

“어휴, 약속할게요! 약속해. 그런데, 황검사님이 결혼 생각을 다 했어?”
“생각은 할 수는 있잖아요, 생각은.”

앞만 보던 시목이 도리어 미간을 찌푸리곤 투정을 부렸고, 여진은 놀란 눈을 둥글게 뜬다. 시목은 차가워진 손으로 저의 열 오른 얼굴을 쓸어내린다. 한경감이 그의 손을 잡고 있고 그대로 체온이 전도되고 있다는 걸 그도 모르지 않지만 더는 숨길 도량이 없어 시선을 이리저리 돌릴 뿐이다.

“근데, 나도 그런 생각은 했어.”

시목의 행동의 방황이 멈춘다. 여진이 짧아진 담배를 입에 물었다. 끝이 수수하게 타들어간다. 연기를 뭉근하게 뿜는 입술과 동그란 코 끝.

“우리가 하고 있는 게 결혼생활과 뭐 그리 다른지…,”

여진이 코를 습관처럼 훌쩍인다. 시목은 여진의 휑한 목 주변으로 옷자락을 끌어 당겨주고, 얌전한 침묵을 지키며 그녀의 목소리를 담는다.

“그리고 이런 템포라면 무리 없을 것 같은데 그럼 그냥 결혼을 할까… 싶기는 했지. 만에 하나 아이가 생길지도 모르고. 그렇잖아?”

몇 번을 더 빨아들이곤 재떨이에 다가가 불씨를 끈 여진은 제 바지에 손을 쑥 넣는다. 주머니에서 민트 사탕을 꺼내 하나 혀에 올린 후 다시 주머니로 집어넣는다. 철제 통에 손톱만한 사탕들이 찰랑찰랑 소리를 냈다. 시목은 그녀에게 시선을 맞추지 않고 오물거리는 뺨만 본다. 여진은 그 눈을 보기 위해 고개를 갸웃했다. 눈이 맞자 속이 동요했지만 시목은 피하지 않았다.

미소를 방긋 지어 보인다.
여진은 마주 웃고, 발걸음을 옮긴다. 좁은 골목을 가로등 밑을 따라 걷는 동안 손깍지는 시목의 주머니에 들어갔다.

“물론 언제든 도망갈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이에요.”

여진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시목에겐 더없이 맑기만 한 눈웃음을 짓고 손가락을 더 굳게 얽는다.

“지금 영원할 것 같다고 말해도, 언젠가, 정말 예상하지도 못한 이유로 영영 만나지 못할 관계가 되어버리는 게 사람 일인걸 모르는 사람 아니잖아. 검사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믿고 싶어 할 만큼 단순하고 유약한 것도 사람이죠. 동시에.”
“음. 검사님도 그렇다는 말로 들려.”

시간이 늦어 골목엔 사람이 드물다. 시목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듯, 주머니의 손을 꼼지락대는 여진. 시목은 고개를 숙인다. 두 쌍의 발이 보인다.

“나도 날 믿을 수 없어요, 여진씨.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인데 이렇게 되어버려서…”

노력하지 않아도 비슷한 속도로 나아가면서, 세 걸음마다 오른발을 맞춘다. 여진도 무심코 발을 본다. 아직 많이 날이 풀리지 않아서 그녀는 종종걸음을 걷는다. 신호등에 다다른다. 빈 거리에 차들 몇이 빛을 달고 서로를 쫓아다니고 있었다.

“결혼이 하고 싶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네요.”
“그러네, 정말 말도 안 될 일이야.”
“나에게 있던 거라곤 회의감과 불신이에요. 나에겐 선례도 없고, 보고 배운 것도 없어.”
“말을 뭐해~ 나도 없는데.”

멀찍이 시선을 던진 시목의 옆얼굴을 응시하던 여진은 같은 곳을 본다.

“근데 여기서 우리가 한 발 더 나아간대도 그게, 그렇게 충격적일까? 검사님.”
“…….”
“이미 우린 충분히 미친 짓을 하고 있었잖아. 그것도 제법 편하고 능숙하게.”

그녀가 웃음을 흘리고 있다. 시목이 눈을 끔뻑이더니, 돌아본다. 건너편 신호에는 노란불이 들어왔다. 굳어 서있는 시목을 끌고 가려는 여진.

“한경감님.”

손이 빠져나가려 하자 시목이 그녀의 손을 불현 듯 꾹 붙잡았다. 당겨진 여진이 시목과 가까워졌다.

“정말 괜찮겠어요, 경감님? 나여도.”

초록불이 환하게 들어왔고, 여진과 시목은 한 뼘 거리에서 서로를 마주한다.
시목은 한경감을 오늘 들어 가장 가깝게 대면하게 되었다. 가벼운 침묵이 길어지자 그녀는 입술을 반쯤 깨물면서 웃고, 눈을 굴린다. 시목이 조용히 호흡하며 시선을 나직이 내리깔자, 눈동자를 굴리며 이리저리 그를 피하던 여진과 마침내 시선이 맞았다. 한쪽 입꼬리를 쓱, 당겨 웃는 여진.

“내가 그랬지, 검사님.”

슬리퍼 신은 발 한쪽을 탁탁 구른다.

“특별히 엄청나게 결함 있는 사람인 양 말하지 말라고. 한번만 더 그러면 나 결혼 안 해줘.”

여진의 기다란 목. 턱 선을 간질이는 봄바람과 머리칼. 시목은 그 끝자락들을 가만히 만지다 한 팔에 감아 자신의 몸으로 끌어당긴다. 여진은 길 건너야 한다고, 춥다고 하면서도 시목의 등에 손을 올렸다. 시목은 작은 어깨에 턱을 기댄다. 고개를 드니 검고 흐린 하늘이 보인다. 비행기가 지나가는지 작은 빛이 일직선을 그리며 멀어지고 있다. 시목은 으스러지듯 한번 꾸욱, 그녀를 안고 놓았다.
문득 주의를 돌렸다가 초록불이 10초대에 진입했단 사실을 깨달은 둘은 누가 먼저랄 것 도 없이 전속력으로 달려 8차선 횡단보도를 질주했다. 건너편에 도착하자 여진이 간질이듯 시목의 허리를 안고 얼굴을 가까이 맞댄다. 시목은 웃는 낯으로 한숨을 쉬곤 여진의 뺨을 감싸 입술을 맞췄다. 반딧불처럼 깜빡이는 네온사인.

“이 시간에 사람이 있기야 하겠어.”

주변을 둘러보곤 흐히히, 작게 실소를 쪼개는 여진. 둘은 서로의 허리를 안고 집으로 향한다. 흩어지는 자동차 불빛이 도로를 적적하지 않게 메꾸고 사라져갔다. 한경감을 만나기 전과 지금과 다를 바 없는 집 앞의 풍경이 새삼스럽다.

“근데 자기 나 조건이 있어,”
“뭔데요,”

시목은 공연히 보도블록의 벽돌무늬를 헤아리며 뛰는 심장을 다스린다.

“듣고 싶어. 그 말.”

시목의 점퍼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팔랑팔랑 걷는 여진. 시목은 잠깐 겁먹은 눈초리를 보낸다.

“지금 프러포즈를…?”
“아니! 너무 형식적이잖아. 그거 말고.”
“그거 말고요,”
“응. 다른 말.”

이제 무언가가 매달리기 시작한 나무들. 가로수와 보도블럭 사이를 걷는 길고양이는 꼬리를 세우곤 울타리를 가볍게 넘나든다. 둘은 말없이 길을 걸었다. 시목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가, 자기 옆에서 걷는 한경감의 체향과 체온을 숨처럼 들이 마시고 가벼운 날숨을 뱉었다.

“난 사랑이 뭔지 모르겠어요.”
“응, 나도 그래.”
“내가 하는 게 소위 말하는 사랑인지 조차도 나는 잘 모르겠어요.”
“응, 그런데?”

여진이 돌림노래처럼 시목의 목소리를 이어받는다.

“하지만 경감님이 사랑으로 느낀다면, 내가 사랑을 하고 있는 거라고 느낀다면… 그럼 됐어요.”

시목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지만, 꾸준하게 터벅터벅 여진과 발을 맞추어 걸어 나간다.

“나는…, 사랑하는 거예요. 경감님을.”

그때 머리 위에서 온난한 기류가 내려와 길거리를 사로잡았다. 희끗희끗 어린 싹을 매단 나뭇가지들을 감싸 잡아 장난스러이 두드리곤 나긋나긋한 걸음을 걷는 두 사람의 옷자락을 공연히 흔든다. 그러고 유유히 제 갈 길을 가는, 봄의 바람. 여진은 고개를 치켜들고 하늘을 본다.
시목은 그녀의 패턴을 안다. 아마, 온 진심을 다해 기뻐하는 마음일 것이다.

“뭐야, 하나도 안 어렵나봐. 기다렸단 듯 말하잖아.”

깔깔, 여진이 웃음을 터트린다.

“검사님은 역시 선수인 게 맞아.”
“누누이 말하지만 그건 아닌”
“그래서 좋다는 건데?”
“그럼 됐고요…,”

목소리가 기어들어간다. 여진은 시목을 향해 얼굴을 불쑥 들이밀곤, 시목의 얼떨떨한 코끝을 손으로 톡 건드린다.

“얼음땡이니까, 이젠 결혼 얘기에 긴장하지 말기. 오케이?”

시목은 저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와 함께 그들의 집으로 돌아간다.
여진의 얼굴에 그려진 긍정적인 호선들을 시목은 마음에 담아두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기어코 도래하고야 만 봄이 사람들의 옷자락에 꽃가루를 묻히듯 안방엔 두 사람의 사진이 한 장 조그맣게 붙었다. 어차피 마음먹은 거라면 그냥 더 바빠지기 전에 해치워 버리자며 오히려 시목보다 빠른 날짜를 제안한 여진에게 시목은 모든 걸 긍정적으로 대답했다. 여진의 친구들에게 자신을 소개시켰다. 생각보다 어색해하지 않는 황검사를 보면서 여진은 역시 선수라며 놀렸다가 다음날 아침까지 시목과 눈치게임을 해야 했다. 양측 부모에겐 통보 식으로 결혼을 전하고 점심식사로 대접을 마친 뒤, 둘은 원철 내외에게 저녁식사를 대접했다. 결혼 파티에서 덕담을 한마디 해주십사 부탁을 건네자, 원철은 뜨끈한 사케 잔을 단번에 들이켜곤 감동으로 눈시울이 붉히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 내비친 뜨거운 감사와 미소가 얼마나 정다웠는지 모른다. 늦은 밤 시목은 여진과 가벼운 걸음으로 돌아와 소파에 나란히 앉아 카라멜팝콘을 먹었다.

이미 차려진 살림살이에 법적 관계를 하나 추가하는 셈이니 겉으로는 다를 것이 크게 없지만 시목은 하루가 다르게 말라갔다. 그래도 어느 날 부터는 잠을 잘 수 있었고 얼굴 피부가 한결 부드러워지기 시작했으니 여진과의 아주 사적인 테라피가 효과를 낸 것이다.

결혼 파티에서 둘은 가장 좋아하는 옷을 입고, 좋아하는 사람들을 불러 맛있는 것을 먹으며, 좋은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그날은 다행히 하늘도 청명했다.

아끼는 파란 롱 원피스를 입고 하얀 신발을 신은 여진. 시목은 생전 처음 아름다움이란 걸 보게 된 사람처럼 서 있었다. 여진은 가끔 시목의 눈동자에 비친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하다 손바닥을 흔들어 보였다. 해사하게 웃으며 줄곧 거울에 자신을 돌아보았다. 시목은 울거나, 지나치게 많이 웃지는 않았으나 여진의 존재를 그의 몸에 확인하듯 자꾸만 그녀를 품에 껴안고 아득하게 침묵했다.

“도망가고 싶다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야, 검사님.”

여진은 거울 앞에서 한 바퀴를 휘 돈다. 그녀의 다리를 감싸는 파란 궤적.
그녀의 옆에는 하얀 셔츠를 입고 단정한 얼굴을 한 남자.

“그런 일도, 그럴 일도 없습니다.”

그 말에, 여진은 시목을 또렷하게 바라보다 싱긋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럼… 하죠, 결혼.”

등을 곧게 세우고 목을 쭉 편 뒤 당당하게 앞을 응시하는 여진. 시목은 곁눈질을 하다, 저도 모르게 등을 폈다.
여진이 목을 가다듬는다.

“만만치 않겠지만, 뭐, 우리는 만만한가?”

확신에 가득 차 전류가 흐르는 듯하다.
우뚝 선 시목을 향해 돌아선 여진은 시목의 맑은 남색 타이를 매만진다. 손끝에 잘게 힘을 주며 매듭을 당기자 금방 단단하게 묶였다. 시목은 천천히 눈을 깜빡인다.

“경감님. 나 들어야할 말이 있는데,”
“어, 무슨 말씀이신지…?”

손이 올라와 그녀의 어깨를 감싸자, 그걸 확인한 여진이 혀끝을 물고 장난스러이 웃음을 흘린다. 하지만 시목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어깨에 올려져있는 손을 덮어 쥐는 여진. 그와 시선을 꼿꼿이 맞춘 채 눈을 살풋 감고 손바닥에 입술을 가볍게 눌렀다. 체온과 숨을 가득 담아주고는 이내 새어나가지 말라는 듯 제 손으로 꼭 잡아주었다.

“사랑해, 검사님.”

황검사는 그녀를 껴안았다.

오르락내리락 하는 숨소리, 몸, 한경감의 어깨에 코를 박으면 쉽게 느낄 수 있는 봄바람 냄새. 울음이 터질 것 같아서, 시목은 무턱대고 눈을 꼭 감았다.

“사랑해요, 경감님.”

 

어쩌면 모든 게 한심하기 짝이 없는 감정 놀이에 불과해진대도,

깊은 행복에 몸을 던질 수 있는 용기는 결코 한심하지 않을 것이다.

© 2019 by Soulmates Collabo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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