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별의 키스
쇼코 @F__Shoko
작별의 키스
시목X여진
w. 쇼코
#1
Fair is foul, and foul is fair. Hover through the fog and filthy air.
『 Macbeth 』, William Shakespeare
최근 들어 시목은 기괴한 기시감에 시달렸다. 여상히 겪어온 이명과는 조금 다른 성질이었다. 시목은 기존의 이명이 번져 기억에 문제가 생기고 있는 건 아닌지 조금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몰아치는 수사 일정 속에서 병원 예약을 두어 번 걸었다가 취소하기를 반복하자, 시목은 결국 이 기괴함이 그저 비과학적인 현상이라 밀어두기로 결정했다.
단순한 데자뷰로 치부하기에 여러 번 오버랩되는 장면들이나 피곤한 눈을 붙이고 누운 자리에 끼어드는 악몽, 등골이 서늘해지곤 하는 불규칙한 상황들은 시목을 더 이상 회피할 수 없는 구석까지 몰아붙였다. 지능적 범죄를 일삼는 연쇄 살인마 추적으로 검경을 불문하고 언론과 등댄 채 오감이 곤두선 상황이라지만 큰 스트레스를 내미는 장면들은 업무와는 전혀 별개인 경우가 많아서 시목의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게 어떤 경우냐 예를 들자면,
- 검사님!
신호를 기다리고 있던 횡단보도 앞, 뒤로 당겨지는 감각에 휘청이며 발을 뒤로 물리면 구두코를 스치고 지나가는 오토바이 한 대. 코트 뒷덜미를 단단히 쥐고 있던 악력이 사라지고 이번엔 시목을 안전한 보도 안쪽으로 깊숙이 밀어버리는 손길 그치지 않는 여진이 눈앞에 나타난다.
- 저거, 저거 미친 놈 아니야? 큰일 날 뻔했어요. 다친 데는 없어요?
시목은 별 일 없이 그저 스쳤을 뿐인 일에, 어쩌면 자신이 다른 생각에 골몰해 조금 부주의하게 자처한 사고의 위협에 여진이 과민 반응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동시에, 그 오토바이의 번호판도, 이상하리만치 화려한 헬멧까지도 어딘가 눈에 익는다. 구두는 여전히 깨끗하건만 어디선가 찢어져 더러워졌을 듯하고 초록 신호가 점멸하기 시작한 지검 근방 신호등조차도 낯설다가 다시 낯익다가 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명에서 깨어난 도로 위처럼.
“한 경위님.”
“응?”
여진의 둥그렇게 뜬 눈을 마주치자 시목은 판단력이 흐려지는 느낌에 잠시 입을 다문다. 불가해한 기시감 하나 때문에 그를 추궁하는 건 역시 어불성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근거 없는 수사와 용의자 특정만큼 자신이 멀리하던 것은 없었으므로. 더군다나 요즈음 병이 생긴 것 같은데 그 원인은 당신인 것 같다, 라고 말하면 얼마나 우스운 소설이 되겠는가. 감수성이라고는 없고 맥락을 구성할 이유도 찾지 않는 황시목이라도 그 정도 낯 뜨겁고 불필요한 문장은 벗어날 줄 알았다.
“…지검 앞은 어쩐 일이십니까?”
그러니 여상한 관용구를 꺼내어 시목은 이상한 감정에서 회피한다. 다시 신호가 바뀌고 녹색을 마주하며 여진과 시목은 나란히 걸었다.
“검사님 보러 왔죠.”
뭘 그렇게 당연한 걸 묻느냐는 눈으로 여진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그의 눈은 깨끗하고 정의로운 그 성정을 그대로 드러내어서, 시목은 언제나 여진에게 당황하는 동시에 감탄해왔다. 모두를 조사해도 여진만은 그러지 않으리라 다짐했었으나, 그 결심을 어긴 것도 꽤 최근의 일이었다.
정말로, 왜일까.
점점 그 눈이, 목소리가, 알 수 없이 소란스럽게 느껴졌다.
누적되어온 의심에 잠겨 말이 없는 시목에 무안했는지 여진은 괜히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농담이에요. 지난주에 청파동에서 발견된 신원 미상 시체 있죠? 국과수에 맡겼는데 부검 결과 나왔어요.”
여진이 서류봉투를 들어 보였다. 크게 국과수 마크와 기밀 인장이 찍혀 있었다. 형사과 사무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여진이 계속 말을 이었다. 늘 그렇듯 다소 낮고, 진중한, 그런 목소리로. 시목은 이 보고 역시 어디선가 들어본 적 없지 않았나 하는 기시감에 사로잡힌다. 유사한 사건이 있었나? 형사과의 사건은 엽기 살인이 아닌 이상 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편이긴 하지만…….
“위 내용물이 소름끼칠 정도로 거의 없었대요. 머리카락이 유독 쥐어뜯겨 나간 자리가 있어서 검사해봤지만 DNA도 도출 안 됐어요. 그리고…."
“한 경위님.”
때마침 엘리베이터의 도착을 알리는 딩동, 작은 벨소리가 났다. 여진이 시목의 얼굴을 마주친다. 주변을 흘끔 돌아본 시목이 여진의 등을 살짝 밀어 엘리베이터에 먼저 타게 하고, 자신 역시 뒤따라 탔다. 층수보다 닫힘 버튼을 먼저 누른 시목이 의구심으로 낮게 굳은 목소리를 내었다.
“당신, 누구입니까?”
#2
마녀들은 불완전한 화자이다. 그들의 말은 완전하지 못하며 언제나 이중의 의미를 가지고 발화된다. 마녀들의 말은 현실세계에 나타나 구체적이고 실체적인 역할을 하지 않지만 등장인물의 가치관에 영향을 끼치면서 사건의 전개에 영향을 미친다.
『 마녀의, 마녀에 의한, 마녀를 위한 「맥베스」 연구 』김세정, 2011
“잠깐만요, 검사님. 잠깐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시목은 그게 무슨 말이냐며 최선을 다해 시치미를 떼는 여진을 데리고 회의실 문을 열었다. 형사과에서 이름 날리는 트러블메이커와 일품 공조 경찰의 조합은 첫 사건 이후 두세 달이 지나가는 지금 제법 익숙한 종류라 대부분의 직원들은 둘의 등 뒤로 문이 닫히는 데도 엮이지 않기 위해 멀찍이 발만 뗄 뿐 입소문도 옮기지 않았다. 여진을 회의실 데스크 앞에 두고 자신은 문을 등지고 선 시목이 입을 먼저 떼었다.
“언제 저를 처음 봤습니까?”
“당연히 후암동 박무성 사건 때부터….”
“그걸 말하는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아시잖습니까?”
여진의 입꼬리가 잘게 떨렸다. 커다란 눈을 시목은 점점 몰아붙였다.
“아침의 그 바이크. 두 달 전에 저를 포차로 불러내신 직후 제 아파트에 침입한 강도. 삼 주 전 제가 보복성 습격을 받았을 때 신고한 시간에 비해 너무 빨리 도착하셨던 출동. 그 외에 자잘한 접촉사고나 사고 위협에 있어서 가장 먼저 나타나셨던 일. 이게 전부 우연입니까?”
이게 대체 뭐하는 상황이람. 여진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긴장감에 떨리는 손이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검사님,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긴 해요?”
“그럼 직접 말씀해보시죠.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말이 되는 소리를 해요!”
“학력부터 직장, 가족관계까지 전부 털어 봐도 수상한 점은 없더군요. 그게 더 수상할 정도로. 어떻게 저를 전부 잡아내셨습니까? 경위님이 안 계셨다면 제가 여기에 오지 못할 정황이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그럼 그때나 물어보지 왜 이제 와서 그래요? 다 우연 아니면 검사님이 나한테 연락을 했으니까…”
“감안하더라도 말이 안 됩니다. 처음부터 경위님이 다 알고 계셨던 것처럼 일이 일어났잖아요.”
“그거야 검사님 생각이구요.”
“15분 전에 용산서에 계시다는 연락을 받았는데도 남해 지검 근처 도로에서 경위님을 봤던 일은요?”
“그거야 그때 서에서 전화 받은 사람이 착각한 거라고 말했…”
“당일 CCTV 확인했습니다. 잘 계셨더군요. 정말로.”
“검사님, 지금 나 의심해요? 그런 일도 그럴 일도 없다고 한 게 누구였지?”
“그때랑 지금은 다른 상황입니다. 이미 다 알았어요.”
“아니 그런 거 아니라니까! 평범한 사람이 뭘 안다고 지금 나한테!”
실수했다.
여진이 낭패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시목은 분명히 인간인데. 완전한 신념과 굳건한 영혼을 지니고 피와 살이 붙은 유한한 육신으로 시목은 지금 여진의 비밀을 짐작해냈다. 말이 되는 일인가?
“…한여진 씨. 당신,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지친 듯 고개를 푹 숙이자 여진의 양 빰 위로 쏟아진 머리칼 때문에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검사님."
"네."
"검사님이 상상하는 모든 게 진실이에요."
기이한 자백. 그러나 상대를 놀리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말끝이 공허한 문장. 그의 추리를 모두 긍정하는 말이나, 물증도 내밀지 않고 검사를 상대로 거는 장난질. 여진이 속으로 조소하는 동안 시목은 그를 따라 간결해지기로 했다.
"경위님."
"……."
"지금 저는 경위님을 취조하는 게 아닙니다."
분명 다른 목소리다. 수사하는 그의 낯과도 한참 먼, 어떤 거리가 보였다. 그는 어차피 남들보다 상상력도 없고 허황된 생각은 잘 하지 않는 이였으므로, 이런 기이한 자백은 썩 도움 되지 않을 것이다. 여진은 저도 모르게 눈에 고이려는 눈물을 참았다. 그러나 참지 못한 마음의 어떤 탄식이 새었다.
여진이 책상 위에 무너지듯 주저앉고, 시목은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그를 받치려다 조금 망설여 거둔다. 시목은 여태 느껴본 적 없는 슬픔을 여진의 온몸에서 받을 수 있었다. 여태 어떤 사람에게도 공감할 수 없는 감정의 폭이다. 여진이 지나치게 깊어서였을까, 아니면 그저 그 감정 발산의 주인이 한여진이라는 사람이기 때문일까.
"한여진 씨."
조금 놀란 듯 여진이 고개를 들자 시목은 질문을 이어 발음했다.
"진명은 뭡니까?"
여진이 고개를 뒤로 쭉 젖혔다. 두 손이 그 등 뒤로 놓인 책상을 짚고, 동그란 눈길이 천장의 환한 형광등 빛에 닿고 나서야 기울어지기를 멈췄다. 여진의 짤막한 머리칼이 허공에 흩어져 늘어졌다.
"많아요. 아주 많아요."
다시 고개를 든 여진이 시목을 마주보았다. 시선이 약하게 기울어져 만난다.
"한여진, 도 그렇게 오래된 이름은 아니에요. 겨우 삼십 년 남짓 썼잖아요."
말간 목소리 정말 선연한 호기심만 남기고 가벼웠다. 정말이다. 흠집 없이 자연스러운, 그래서 수상해보였을 삶의 기록도 어디까지나 만들어낸 발자취다. 그러나 그를 보는 시선만은 뚜렷했다.
"그렇지만요, 황 검사님. 나쁜 의도로 있는 건 아니에요."
예기치 못한 물기가 여진의 광대를 지나 뺨 위로 뚝 떨어지는 걸 시목은 보았고 여진은 날카롭게 느꼈다. 칼에 베이는 기분이 들었다.
“내 이름은 이제 황 검사님이 불러주는 한여진이 전부인 것 같아요.”
#3
“나는 사실 몇 번이나, 몇 십 번이나 검사님을 처음 만났어요. 이상하죠. 아닐 것 같죠. 아마 검사님은 기억 안 날 거야. 매번 나만 기억했어요. 언제부터냐면….”
과연 믿고는 있는 걸까. 들리긴 하나? 긴가민가한 얼굴로 시목을 살펴본 여진이 한숨을 쉬었다.
“후암동 사건이 전부 정리 되고 검사님이 남해로 가셨다가, 다시 특검 때문에 서울로 오셨잖아요.”
고개를 끄덕이는 시목을 여진은 여전히 생각할수록 고통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비례대표 의원 하나를 뒤집어엎다가 검사님이 표적이 되어서, 그 의원 측에서 살인청부를 했어요. 아무도 예상 못했어요. 설마 그렇게까지, 싶었거든요. 한조의 선례가 있어서. 그, …영 검사님 일이요.”
시목도 여진도 모두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직까지도 속이 쓰린 이름이었다.
“황 검사님도 그렇게 죽었어요.”
검사님도 그렇게 죽었었다구요. 서러운 목소리로 여진이 눈물을 뚝뚝 흘렸다. 눈 똑바로 뜨고 짖어서 세상을 바꾸자던 그때처럼 여진은 정말 억울하고 답답해보였다. 그때, 세상을 바꿔보겠다고 일하던 사람을 또 잃어야 했을 때. 인간을 원망하고 싶지 않으나 자꾸 원망스러워졌을 때.
“가지고 있던 힘을 써서 시간을 돌렸어요. 어떻게든 살려보려고요. 그런데 살인청부업자가 전부는 아니더라고요. 교통사고부터 화재까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죽음을 봤어요. 꼭 그때 즈음이 되면 황 검사님은 죽었어요.”
온통 붉어져서는 숨을 빼앗긴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온갖 곳에 놓였었다. 끔찍해지는 기억에 여진이 셔츠 소매로 눈물을 마구 훔쳤다. 퍼석한 옷감이 스치자 눈가가 쓰렸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예요. 나도 힘이 거의 다 닳았거든요. 아까 스쳤던 바이크는 일곱 번째 돌아갔을 때 검사님을 죽인 바이크였어요.”
이번엔 뭐가 검사님을 죽일지 모르겠어요. 힘겨운 목소리가 중얼였다. 주먹 꽉 쥐고 있는 하얀 손이 떨렸다.
“……예의가 아닌 질문이긴 합니다만,”
시목이 천천히 입을 떼었다.
“왜, 그렇게까지 하고 있습니까?”
그렇게 힘겹고 고통스러운 얼굴은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세상을 고쳐보려고 애쓰던 얼굴보다 더 절망스러운 얼굴은 처음 보게 되는데.
“모르겠어요. 정말 모르겠어요.”
여진이 마른 손으로 뺨을 문질렀다. 눈물을 닦아낸 자리가 쓰렸다.
“그런데요 검사님, 아마 이해 못하시겠지만… 저항할 수 없는 마음 같은 거였어요. 검사님의 다음 생을 알아볼 수 있는 것만 해도 저는 너무 기뻤거든요. 그 다음에는, 그 생을 아무한테도 주고 싶지 않아졌어요. 검사님이 누군가에게 조금만 친절해도 저는 싫었어요. 너무 비참해지고 불쾌해져요. 그런데 검사님이 저를 믿는다고만 해주면, 저를 가장 큰 아군으로 생각해줄 때면… 가장 다른 얼굴을 보여줄 때면…… 어떻게 해서든 곁에 있고 싶어지잖아요.”
이성적으로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시목은 깊은 한숨을 흘리며 몸을 문에 거의 기대었다. 머리가 무거웠다. 믿기 어려운 사연에도 믿음이 가고 있다는 사실이 혼란스러웠다.
“조금만 더 버티면, 이번 차례에 드디어, 성공이에요.”
희미하게 웃으며 여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부서질 테지만, 검사님은, 살 수 있어요.”
그러니까 어디 가지 말고 오늘은 나랑 있어요……. 허탈하고 애처로운 목소리로 여진이 시목의 팔뚝을 잡았다. 어쩐지 뿌리쳤을 것 같은 손을 도무지 밀어내지 못한 채 시목은 황망히 여진을 마주하고 섰다. 당신이, 부서진다고?
“왜, 부서집니까?”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했잖아요. 있는 힘을 전부 썼거든요. 남은 수명을 걸고 만든 기회였어요.”
“그런 무모한 짓을 왜 했습니까?”
여진은 왜 그런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그러나 미련은 없다는 듯 가벼운 얼굴로 그를 보았다.
“좋아해서요, 검사님.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해서요."
그런 말로 이렇게 이기적으로 굴 수도 있는 거고, 사랑을 빙자한 행위들을 꾸며올 수 있었다. 절절한 목소리에 시목은 더는 반박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언제나 그랬고, 한여진은 더욱 그렇게 보였다.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여진의 평소보다 더 낮은 목소리에 시목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지난번에 본 영화에서요, 헤어지는 연인이 마지막 키스를 하더라고요.”
눈물이 그렁거리는 눈으로 여진이 입을 끌어당겨 웃었다.
“우린 아직 애인 사이도 아니고, 나만 짝사랑하지만, 해봐도 될까요?”
죽는 사람 소원 하나 정도는 들어준다잖아요. 물기 머금고 먹먹한 목소리로 애써 농담인 체 말하는 여진을 보며 시목은 짧은 숨을 들이킨다. 문짝에 기대었던 몸을 일으켜 바로 선 시목이 그대로 고개를 아주 조금 튼다. 그는 아주 서툴고, 경험 없는 티를 깊게 드러내며 여진의 뺨에 먼저 입술을 갖다 대었다. 마치 예행 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마른 눈물 자국이 입술 아래로 그대로 느껴졌다. 한 템포 쉬고 시목이 여진의 입술로 옮겨가려던 순간, 여진이 먼저 고개를 돌려 시목의 입술에 제 입술 겹친다. 누구 것인지 알 수 없는, 닿은 입술에서 찻잎 향이 난다. 찻물보다 짙어서 입술을 마비시킬 것 같은 맛이 났다. 처음이 이렇게 쓰다고 아무도 경고해주지 않았으니 시목도 여진도 조금 당황스러운 마음 서로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여진이 먼저 두 입술 사이를 열고, 시목 역시 고개 틀어 그 입술 새로 들어설 때가 되었을 때 말간 감촉이 그 쓴맛 서서히 가시게 만들었다.
수십 번 자신을 만나러 왔을 때 혹시 단 한 번이라도 입술 맞대는 데에, 서로 마음을 들키는 데에 성공해본 적 있냐고, 시목은 그렇게 묻고 싶어지다가 다시 삼키는 입술 속에서 말을 잃는다. 지금 여진이 절절히 읊은 감정이 모두 사랑이라면 시목 역시 기꺼이 여진을 사랑하고 있었음을 고백하지 못하고 있음이, 지금 너무도 당신을 갈구하기에 뱉어낼 수 없음이 비열해 한탄스럽다.
달군 숨이 서로의 간극에서 투명하게 증발하고 마침내 입술을 떼었을 때, 여진이 다시 뺨 위로 눈물을 흘렸다. 울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는 듯 서럽게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웃으려는 건지 울고 싶은 건지 알 수 없는 낯으로 여진이 쉴 새 없이 중얼였다.
“검사님, 진짜 좋아해요. 좋아했어요. 처음이에요. 오래 사는 내내… 처음으로, 사랑에 빠졌어요. 그게 검사님이에요.”
정말 작별하려는 사람처럼, 여진은 하염없이 울었다. 늘 의연하던 얼굴이 낯설게 젖어가는 걸 보며 시목은 짧게 심호흡했다.
“한여진 경위님.”
젖은 눈과 마른 눈이 허공에서 부딪치고, 시목이 감정에 뒤덮여 꺼내지 못했던 낱말을 몇 개 이어 붙이려 했을 때…
시계바늘이 갈 길을 떠나고, 한여진이라는 사람은 마침내 부서져 빛처럼 흩어지고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