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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기원

 “검사님. 나요...”

 

쿵, 벌컥 문을 연 여진이 씩씩하지만 진지한 얼굴로 황 검사의 책상 앞에 섰다. 일에 집중하던 시목이 답지 않게 깜짝 놀랄 정도였으니 그는 문짝이 부서지진 않았나 가볍게 살폈다. 그러곤 다가와 제 명패를 쓰다듬는 여진의 두 손에 잠깐 이끌렸다가 그냥 궁서체도 아닌, 굵은 궁서체로 가득인 여진을 덩달아 긴장해서 봤다.

 

“나...”

“예. 말씀 하십쇼.”

“흠,”

 

여진은 부러 과장되게 한 손가락을 이마에 짚고 그녀 특유의 눈썹 찡그림을 선보였다. 결심한 듯 여진은 손가락을 내려 두 손을 제 배에 갖다 댔다.

 

“내 배에, 아가가 있데.”

 

말을 내뱉는 첫 순간부터 여진은 뚫어져라 시목만을 바라본다. 예상치 못한 여진의 발언에 시목의 미간이 좁아졌다. 정확히 5초의 정적이 있었다.

 

“아, 예. 축, 하드립니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보여 지는 시목의 무감각한 얼굴이었지만 나름 그의 초상화를 수 번 그려온 한 여진 선생은 미묘한 변화를 캐치하곤 입술을 씰룩 거렸다.

 

“축하해요? 진짜? 그냥 축하만?”

“...예. 축하요.”

“거, 참. 우리 황 검사님 진짜 이상하시네.”

“예?”

“아니, 내가 검사님 서울로 올라온 후로 검사님하고 허구언 날 붙어 다녔잖아요? 그 와중에 갑자기 애가 생겼다는데 도대체 애가 언제 생긴 건가, 뭐 이런 의문 없어요?”

“뭐, 만날 만난 건 아니니까요.”

“좋아요. 그래, 좋다 이거야. 그럼 애 아빠는? 그건 안 궁금하고?”

“말씀해주시려면 하시죠.”

“...”

 

여진의 침묵이 길어지자 그녀의 눈치를 살푸시 본 시목이 말을 덧붙였다.

 

“제가 아시는 분인가요?”

 

여진의 열의에 대꾸를 해주려 시목이 나름 노력한다.

 

“누굴 거 같은데요. 똑똑한 우리 검사님 추리 실력 한 번 보죠.”

“흠, 장건 형사님?”

“이유는?”

“용산서에서 경감님과 가장 친밀한 분이죠. 엊그제에도 형사님과 술 한 잔 하셨잖습니까.”

“아하. 오케이. 다른 용의자는?”

“용의자요? 에효. 글쎄요. 저도 더 이상은 잘...”

“서부지검에도 나 아는 사람 많은데. 자주 들락거리기도 했고.”

 

여진의 흘리는 말에 다시 시목이 고민에 빠졌다. 서부지검? 그의 머릿속이 팽팽 돌기 시작했다. 그의 명석한 두뇌는 정작 여진이 짚고 싶은 사람만을 비켜 가고 있었다.

 

“서동잽니까?”

 

갑자기 시목의 목소리가 무거워졌다.

 

“으으? 서검사님이요? 많고 많은 서부지검 사람들 중에 하피일? 근거는?”

“경감님한테 찝적거릴 사람을 골라봤습니다.”

“에이. 내가 서검사님 스타일이 아닐텐데. 서검사님은 막, 그, 응, 막 거시기한 스타일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

“거시기한 스타일은 어떤 스타일입니까?”

“아, 왜 있잖아. 아이고 됐어요. 그럼 이 서부지검에서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서동재 검사라는 거네요.”

“흠. 모르겠습니다.”

 

다시 고민에 빠진 시목이 턱을 괴고 입술을 앙 다물었다.

 

“지난번에 경감님이 연상 좋아하신 댔죠? 나이 많은 사람.”

“많은 거 까진 아니지만 여튼 그랬죠.”

“그럼, 혹시, 이건 아주 만에 하납니다. 저희 검사장님...?”

“예에에에? 강원철 검사장님이요? 진짜?? 아니, 왜? 검사장님 결혼 하셨잖아.”

“이혼 하신 걸로 아는데요. 나이도 있으시고. 무엇보다 꽤 자주 검사장님과 담소를 나누셨잖습니까.”

“아니, 이렇게 편견 없는 사람이었어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지난번에 제가 맡은 사건 용의자는 부부간에 16살 차이가 났습ㄴ...”

 

시목의 말에 여진이 경악을 금치 못하는 사이 좀 전에 여진이 들어온 것 보다 요란스럽게 문이 열렸다. 화난 곰 같은 발걸음이 씩씩거리며 다가왔다.

 

“이 노므 자식이!!! 뭐가 어쩌고 어째? 이게 어디 상사한테!”

 

검사장님. 시목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원철을 맞았다. 깜짝 놀란 여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원철을 어벙하게 바라봤다. 감히 대한민국 지검장을 두고 방금 저들이 어떤 소리를 했던가. 순식간에 여진은 대화 내용을 복기했다.

 

“어쩐 일로, 여기까지...”

 

담백한 시목의 말에 원철이 숨을 쉬익쉬익 몰아쉬며 삿대질을 했다. 여진이 시목의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우연히 본 원철이 인사도 할 겸 따라 들어오다 본의 아니게 시목과 여진의 은밀한 대화를 엿듣게 된 것이었다. 아무리 점심시간이라 사무관이 없었다고 한들 검사장 체면에 엿듣는다는 것이 좀 체통을 구기긴 하지만 어쨌든 그런 이성적 판단보단 단전에서 치미는 화가 앞섰다.

 

처음엔 여진이 애를 가졌다는 소리에 원철은 저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턱 막았다. 헉. 여진이 미혼이라는 사실보단 그녀가 한여진 경감이라는 사실이 그의 탄식을 일게 했다. 황 시목 옆에 있는 한 여진! 아니, 뭐 솔직히 원철은 한여진의 오른팔이 황시목이라고 생각했다. 왜냐고? 황 시목이 저 놈이 다른 건 몰라도 인간관계에선 썩은 무만도 못한데 그 썩은 무로 무 조림도 하고, 하물며 화분에 심어 인테리어에 쓸 여인네가 바로 여진이었으니까! 여진에 대한 알 수 없이 치솟는 호감도는 아마 그러한 부류의 이유 탓이었다. 존경심이랄까.

 

황시목과 곧잘 붙어 다니는 한여진의 애의 생부가 황시목이면, 황시목이지 용의자 타령이나 하며 돌아이처럼 떠드는 두 사람의 대화에 기가 차고 속이 막혔을 쯤 서동재 얘기가 나왔다. 서동재? 지랄한다. 원철은 조용히 씹어냈다. 황시목, 똑똑한 척은 다하더만 서동재? 허, 참. 그러다 제 이름이 나왔을 땐 웃음은 싹 가시고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뭐? 내가 이혼을 해? 허, 개똥같은 소리! 내가 오늘 아침에도 우리 마누라 아침 차려주고 왔다 쨔식아! 원철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문을 부술 듯 열었던 것이었다.

 

“검사장님, 안녕하셨어요.”

 

정신을 차린 여진이 원철에게 인사를 하자 원철이 여진을 향해 씩 웃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으응, 한경감, 자주 좀 오라니까, 내 방도.

 

“어디서부터 들으셨습니까?”

“뭘, 어디부터긴 어디야. 처음부터지.”

“왜 엿들으시...”

“이 눔의 시키가! 상사 이혼했다는 헛소문을 나불거리질 않나, 너, 도대체 그 얘기는 어디서 주서 들은거냐? 뭐? 또, 내가 어이가 차서 말이 안 나와. 한 경감이 애가 생겼는데, 뭐, 내가 뭐?”

 

원철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여진은 제가 생각해도 황당할 원철에게 위로할 말이 없어 어색한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죄송, 합니다.”

 

시목이 예의를 차리며 허리를 꾸벅 숙였다. 됐다, 됐어. 내가 말을 말어야지. 이런 걸루다가 시말서를 쓰게 할 수도 없고! 원철이 제 허리에 두 손을 얹고 시목을 위아래로 훑었다. 하여간 황시목이 정말, 이 꼴통.

 

“아, 그건 그렇고 한경감 축하해.”

“예...?”

“애기 말이야. 애 아빠 땜에 힘들긴 하겠어. 쯧.”

 

여진의 표정이 곤란해 졌다. 이걸 어째? 둘만의 -실은 여진 혼자 하고 있는- 비밀 같은 장난이 엉뚱한 3자에게 적발되어 여진은 어색한 얼굴이다. 그런 그녀와는 별개로 야단을 맞을 때까지 멀쩡하던 시목의 표정이 오묘하다.

 

“검사장님은, 아십니까?”

“뭐?”

“애 아빠 땜에 힘들겠다 하셨잖습니까..”

 

그 똑똑하기 이를 데 없는 시목의 순진하고 맹한 얼굴에 원철은 제 단전에서 끓던 화는 가라앉고 콧노래가 절로 날 만큼 웃음이 났다. 서부지검에 확성기를 켜고 물어봐라, 용산서 한여진 경감이 애를 가졌는데 애 아빠가 누구냐고. 하여간 이 놈 사법시험은 어떻게 붙었나 몰라.

 

“너 진짜 몰라서 묻냐?”

“예.”

“너.”

“예?”

“너잖아. 딱 봐도 너 말고 애 아빠가 어딨어.”

“저요?”

 

시목이 멍청하게 여럿 물어오자 원철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았다. 그 때 소란스러웠는지 동재가 들어선다.

 

“황프로, 왜 이렇게 시끄... ... 검사장님?”

“어이구, 용의자 한 분 오시네.”

 

용의자란 말에 화들짝 놀란 동재의 눈이 껌벅거린다. 맛있게 점심식사하고 온 와중에 용의자라니. 내가 요즘 자잘하게는 받아먹어도 크게는 안 먹었는데.

 

“야, 서동재. 한 경감이 애기를 가졌단다. 애 아빠가 누구겠냐?”

“예? 한경감이요?”

 

동재가 여진을 한 번 쳐다보곤 시목을 봤다. 황시목도 남자였구나. 동재는 짓궂게 웃어보였다. 여진과 시목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걸 진작 눈치 채지 못했을 서동재가 아니었다. 실은 이건 눈치의 문제가 아니다. 황시목만 모르는 걸 테니까.

 

“딸이냐 아들이냐? 내가 또 너보단 육아 선배니까 모르는 거 있음...”

 

시목은 정말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동재와 원철을 번갈아 보다가 여진을 봤다. 여진의 곤란해 하던 얼굴은 어디가고 시목의 꼴이 즐거웠던 건지 전에 없이 유쾌해 보였다.

 

전 한 경감님이랑 잔 적이 없는데요. 그건 둘째 치고 전 경감님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시목의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이 턱 막혔다. 시목의 일생동안 내뱉지 못하고 목구멍에만 굴린 말은 몇 없었다. 지독히 사적인 내용인 탓이다. 시목은 여진의 눈치를 한 번 봤다. 그는 꾸물꾸물 웃음을 참아내는 여진을 알 수 없는 얼굴로 쳐다봤다.

 

 

 

 

 

사랑의 기원

 

 

 

“애기아빠- 마요네즈 좀 갖다 줘요.”

 

여진의 말끝엔 웃음으로 축축하게 늘어졌다. 부엌에선 한숨소리가 들렸다. 마요네즈를 들고 오는 시목의 표정이 정말, 가관이었다. 여진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저장하고 싶은 표정이야.

 

“그만 놀리십쇼. 회사에도 소문, 다 날 겁니다.”

“에이. 아까 자초지종 다 말씀 드렸잖아요. 내가 장난 친 거라고.”

“서검사님 입이 그렇지가 않습니다.”

“괜찮아요, 괜찮아. 난 괜찮은데, 검사님 기분 나빠요?”

“에효.”

 

오징어를 찢는 여진의 옆에서 시목이 쭈욱 마요네즈를 짠다. 사람 온기 하나 찾아볼 수 없을 것 같았던 시목의 집에 무려 마요네즈가 있게 된 것은 여진이 시목의 삶에 침범한 후의 일이었다. 칙칙하고 어두운 벽지와 조명 톤은 여전했지만 시목이 종종 홀로 잔업 하는 거실 테이블엔 반건조 오징어와 맥주 캔들, 여진의 목도리, 수갑 같은 것들이 놓여 있다. TV 밑 찬장에는 여진이 그렸을 것이 분명한 여러 그림들이 액자에 꽂혀 장식되어 있다.

 

여진이 오징어를 씹으며 맥주 캔을 땄다. 권하듯 시목에게 맥주 캔을 들어보이자 시목이 고개를 젓는다. 별 상관없다는 듯 여진이 고개를 으쓱하곤 건배할 곳을 찾는다. 시목 앞에 있는 물 컵에 짠. 크으. 시원하게 목을 타고 내린 맥주에 여진이 빙그레 웃더니 옆에 놓인 제 가방을 끌고 와 그 안에 붉은 빛 노트를 꺼낸다.

 

“이거, 검사님이 사준 거. 히.”

 

붉은 노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여진이 웃자 시목이 별 말 없다. 여진은 시목에게 없는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 의미부여. 사소한 것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평범한 것도 특별하게 정의하는 능력이라고 시목은 생각했다. 그에게는 전혀 없는 능력이다. 시목은 지금 여진의 말도 의미부여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사준 노트임을 이 공간에 모르는 사람 없는데 굳이 특별하다는 냥 짚고 넘어 가는 것. 필요한 말만 가장 효율적으로 하는 시목으로선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웠다.

 

붉은 노트의 역사는 시목이 남해에 있을 적부터 시작되었다. 여진이 시목을 보러 남해에 내려왔을 때 바닷가 옆에 있던 작은 문구점에서 산 것이었다. 물론 철저히 여진의 부탁 같은 강권에 의해서였지만. 여진은 딱히 선물이라고 보기 어려운 -구매 대행에 가까운- 노트 하나에 그다지도 특별한 것처럼 기뻐했다. 시목은 그 때도

지금도 바로 그 점이 신기했다. 바닷가 벤치에 앉아 나란히 바다를 보던 두 사람의 침묵은 꽤 오랫동안 깨지지 않았다. 시목은 말을 먼저 걸지 않았고, 여진 또한 개의치 않고 제 할 일을 했다. 여진은 붉은 노트 첫 다섯 페이지 정도를 그림으로 채웠다. 물론 시목의 초상화. 시목을 여진을 한번 힐끔 보곤 특유의 한숨을 지었지만 여진은 어깨만 으쓱 할 뿐이었다.

 

 

 

작전 3. 아기 가졌다고 해보기

목적 : 황시목의 감정 이끌어내기 - 놀라게 하기!

결과 : 놀랐음!! 대박!!

근거 : 미간이 묘하게 찌뿌려짐. (아주 미묘하지만)

: 5초 정적(이게 빼박)

결과 : 질투질투!!!

근거 : 서검사 얘기를 할 때 ‘찝적’ 거린다는 표현을 씀!

: 평소처럼 서검사님이 아니라 “서동재”라고 함! (묘한 질투지!!!!)

 

새로 알게 된 점 : 무심한 황시목은 생각보다 나에 대해 관심이 많다(도끼 병 아님--)

근거 : 스치듯 말한 내용들을 기억함.(장건 형사랑 술 마신 거, 내가 연상 좋아한다고 한거!) ...음, 머리가 좋은 건가?

 

 

 

노트를 펼친 여진이 홀로 킥킥 거린다. 시목은 여진의 저 노트의 용도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른다. 업무용 노트가 따로 있으니 업무용은 아닐 테고, 그림 그리는 용도 정도겠지. 여진이 시목에게는 보여주지 않겠다는 완강한 태도로 잔뜩 웅크리고 노트를 읽자 시목은 앞에 있는 땅콩 하나를 주서 먹는다.

 

 

 

*

 

 

 

온정 가득하고 곧은 마음씨와는 별개로 여진의 삶은 그다지 북적이는 편은 아니었다. 외동딸이었고, 속내를 잘 내비치지 않고 조용한 어머니와, 다정했지만 바쁜 아버지로부터 본의 아니게 홀로 상경한 것이 벌써 십여 년 전 일이었다. 여진 본인 조차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보단 만화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는 일에 빠져 살았으므로 홀로 있을 시간이 많았다. 외롭다고 생각한 적은 별로 없었지만 외로웠던 것 같기도 했다. 한번 빠진 분야는 끝을 보곤 하는 여진이 요즘 가장 빠진 주제는 ‘황시목’이었다. 장르는 미스테리. 난제의 형사사건 같은 황시목은 여진에게 흥미로웠고, 즐거웠다. 그들의 활동에 시목의 참여율은 미미했지만 그래도 혼자 산 이후로 함께 하는 것이 이렇게 재밌었던 적이 있었던가 싶었다. 그래서 시목이 서울로 돌아오고 나선 퇴근 후 옥탑방에서 만화를 보고, 그림을 그리기 보단 시목과 시간을 보냈다. 맥주를 마시고, 그림을 그려주고, 거의 일방적인 대화를 나누고.

 

그에게 성가신 존재는 아닐까 고려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황시목이라는 인간은 제 앞에서-아니 누구 앞이든- 하지 못하는 말이 없었다. 예를 들면 립스틱을 바르고 시목을 만났을 때, 입이 왜 그래요- 하는 그의 뭉툭한 발언. 바쁘면 바쁘다고 얘기했고, 싫으면 싫다는 분명한 의사표시를 할 거라는 확신이자 믿음이 여진에겐 있었다. 여진은 시목의 그런 점이 좋았다. 경찰 뱃지를 달고 나선 많은 거짓말과 위선들을 견문할수록 무엇인가에 대한 의심이 본능적으로 커졌다. 하지만 제 부모님은 의심해도 이 세상에서 황시목이라는 인간만은 제 믿음 아래에 있어 주리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여진의 마음 깊은 곳에 있었다. 여진이 세상에서 본 사람 중에 겉과 속이 가장 일치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요즘 바빠요?”

“아뇨.”

“흐흐흥. 그래서 나랑 놀아주는구나?”

“...”

“내일은 영화 보러 가요. 코하네짱이 나오는 거야.”

“예.”

“아니, 검사님은 왜 이렇게 예스맨이야? 다 괜찮데. 내가 하자는 건 다 좋은 건가?”

 

여진이 장난치듯 시목을 툭 쳤다. 시목은 말이 없다.

 

“말해 봐요. 응?”

“싫은 건 싫다고 하는데요. 술을 권유했을 땐 거절했지 않습니까.”

“아아- 인정.”

 

여진이 맥주를 한 모금 더 들이키더니 입술을 한번 꽉 깨물고 시목의 눈을 마주했다. 시선을 느낀 시목이 땅콩을 입에 넣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또 하고 싶은 거 하나 있는데요. 그것도 예스 해줬음 좋겠어.”

 

시목이 말하라는 눈빛으로 여진을 본다. 여진은 이게 옳은 건가 싶으면서도 내뱉기로 작심한다. 약간의 술기운이 적당하게 그녀의 걱정을 털어냈다. 황시목이 나를 싫어하지는 않는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그녀의 말과 행동에 든든한 받침대가 되었다. 거절당해도 소문은 안 나겠지 뭐.

 

“키스요.”

“예?”

“키스.”

 

되묻는 시목의 말에 여진은 전보다 더 단호하게 뱉었다. 시목은 낮부터 저를 당황스럽게 하는 여진의 발언들에 오늘이 제 생일인가 싶었다. 아니, 한경감님 생일이신가. 생일인데 제가 몰라서 이렇게 짓궂게 장난을 치시는 건가. 시목은 이상한 확신에 휩싸여 여진과 별개로 진지해졌다.

 

“혹시 오늘 생일이십니까?”

“으응? 내 생일?”

“예.”

“왜. 생일이면 해주려고요?”

 

여진이 유쾌하게 웃었다. 저 남자가 어째서 저런 말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드레날린이 온 몸을 강타하는 즐거움이 그녀의 곁에 맴돌았다. 생일 선물 겸으로 해줘요, 그럼. 여진의 말에 시목이 잠시 미간을 찌푸리더니 생각에 잠겼다.

 

“또 거짓말이시죠? 제가 기억하기론 그 노트 사드렸을 때도 생일이라 그랬던 것 같은데.”

 

여진이 지갑에서 제 민증을 꺼내 든다. 우연찮게 며칠 후면 여진의 생일이다. 시목이 여진의 민증을 한 번 보곤 시선을 돌린다.

 

“자요. 얼마 안 남았죠? 미리 주는 셈 치고. 응? 생일 선물.”

“...”

“선물이잖아요. 그게 뭐라고. 애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

 

시목의 침묵에 여진이 입을 삐쭉 내밀며 구시렁거린다. 시목은 제가 여진과 시간을 꽤 많이 보내는 편이며, 그 것이 제게는 꽤 이례적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당연히 알고 있었다. 수술 이후로 처음 ‘우리’라는 이름을 주었던 여진과 친밀한 동료가 되었다. 남해에서 온 이후로 더. 하지만 친한 동료 이상으로 생각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여진 또한 같은 생각이리라 이상하리만큼 확신했었다. 감정이 없는 제겐 당연한 일이었고, 여진 또한 그리 확신하게 된 이유는 그녀가 제게 요구하는 것이 딱히 없었기 때문이었다. 좋아한다는 감정을 드러낸 적도 없었고, 꽤 친한 장건 형사와 저를 비슷하게 취급했다. 퇴근 하고 종종 술을 마시거나, 일 얘기를 나누는 것. 특별한 기류는 단언컨대 없었다.

 

불쑥 튀어 나온 여진 특이한 말은 시목의 확신을 깨 부셨다. 오늘 이상한 장난을 칠 때부터 조그맣게 사이렌이 울리던 그의 머릿속은 지금에 이르러 시끄럽게 앵앵거렸다. 여진을 물끄러미 보던 시목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말없이 고개를 젓는 시목의 행동에 여진이 눈을 귀엽게 치켜뜬다.

 

“이유는요.”

“음. 경감님 때문입니다.”

“응? 나? 나한테 키스하기 싫은 거예요?”

“그런 건 아니고요.”

“그럼 뭔데.”

“경감님은 분명히 의미부여를 하실 테니까요.”

 

단박에 파악이 어려운 시목의 말에 여진이 눈을 똥그랗게 뜬다. 저건 뭔 소리야. 자세히 말하라는 암묵적인 여진의 눈빛에 시목이 얕게 한숨을 쉬곤 말을 덧붙인다.

 

“경감님께서 요구하신 건 어렵지 않습니다. 뭐, 혀와 타액을 섞는 행위니까요.”

 

진지하게 키스를 설명하는 시목의 얼굴이 웃겨 여진은 그만 피식 웃고 만다. 시목이 뭐냐는 얼굴로 여진을 본다. 아, 미안, 미안. 계속 해요. 여진이 입을 손으로 막으며 계속하라는 손짓을 한다.

 

“문제는 경감님이 의미부여를 하실 거라는 거죠. 그걸 하게 되면 경감님은 우리 사이에 의미부여를 시작하실 거니까요.”

“애인으로?”

“예, 뭐 그런 거... 혹시, 경감님은 그냥 동료랑도 키스를, 하시는 겁니까?”

“네? 그건 뭔 소리야.”

“제가 혹시 경감님 마음을 잘못 이해하고 있나 해서요. 보통의 사람들은 좋아하는 사람들과 키스를 하고 싶어 하는데 경감님은 혹시라도 그냥 하고ㅅ..”

“나도 좋아하는 사람이랑만 키스하고 싶은데요.”

 

혹시나, 라는 이름의 질문을 한 시목은 여진의 답변에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은 얼떨떨하기도 하다. 제가 판단한 강력한 확신이 왜 빗겨갔나 재고하면서. 분명 ‘사랑’과 비슷한 기류는 없었는데.

 

“몰랐습니다. 경감님이 제게 그런 감정이신 줄은.”

 

전혀 예상도 못했다는 듯 구는 시목을 보며 여진이 입을 꾹 다물고 잠시 고민하더니 붉은 노트를 펼쳐 몇 장을 휙휙 넘기더니 하나를 쭉 찢어 그의 앞에 턱 내려놓는다.

 

“이거나 봐봐요. 우리 사이가 정말 그냥 동료뿐이었나 잘 고민도 해보고.”

 

시목이 여진이 준 종이를 한 번 보곤 짐을 챙기는 여진을 본다.

 

“확실한건, 나는요, 검사님, 좋아하는 사람만 그려요.”

 

똑똑한 검사님, 열심히 생각해 봐요. 여진이 짐을 챙겨 일어서며 시목의 어깨를 톡톡 두드린다. 저 가요. 내일 연락 할게요. 잘 자고. 시목이 현관까지 그녀를 배웅하곤 자리로 돌아와 여진이 놓고 간 종이를 들여다본다.

 

 

가장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부분을 노려봤다. 황시목이라고 망설임 없이 쓰여 있는 곳을 검지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다 자신이 현재 누군가의 머릿속에 가장 거대한 무언가라는 사실이 새삼 새로이 느껴졌다. 황시목이라는 존재는 35년의 세월 동안 과연 몇 명의 머릿속에 깊숙이 들어가 봤을까. 시목은 평소와 다르게 철학적인 물음을 따라갔다. 어머니와 아버지... 제 부모님을 끝으로 한참을 더 시목은 기억을 쫓았다. 학창시절부터 검사가 된 지금까지의. 장고 끝에 추가한 것은 고작 한 사람이었다. 이 창준. 창준이 제게 주어진 긴 시간과 어쩌면 제게 더 남았을 모든 시간을 희생하며 정성 들인, 나무 한 그루마저 설계돼 심어진 숲에서, 황시목이라는 나무는 핵심이었을 테니까. 이창준의 사활이 담긴 숲에서 뿐만 아니라, 이창준이라는 사람에게도 황시목은 중요했겠지.

 

그럼, 세 사람. 아니, 네 사람. 시목은 속으로 중얼 거렸다. 제 부모님에게 저는 결국 핏빛 고통이자 슬픔이 되었고, 이 창준은... 죽었다. 시목은 그 생각을 끝으로 여진의 뇌구조 종이를 곱게 두 번 접었다. 내일 입고 갈 코트 주머니에 종이를 쏙 넣은 시목은 두 손을 맞잡았다. 우리 사이가 뭐냐고 쾌활하게 묻는 여진의 목소리 톤이 이명처럼 시목의 귓가를 어지럽혔다. 기분 나쁜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은 여진의 물음과 제 물음이 모두 부질없다고 시목은 생각했다. 남들이 저와 여진을 어떤 사이로 보든, 여진이 저를 좋아하든 말든 사실상 크게 상관없다. 황시목에게 한여진은 감정 따윈 섞이지 않은 그저 동료였으니까. 그는 그녀를 좋아하지 않으니까. 아니, 좋아하지 못하니까.

 

저를 낳고 키운 부모님은 저와 한 집에 사는 가족이었고, 이창준은 자신을 내심 신뢰하고 총애하는 상사이자 동료였다. 여진을 어떤 위치에 세워야 그들과 같은 전철을 밟게 하지 않을 것인가. 죽고, 다치고, 상처 받고, 괴롭지 않을 것인가. 이미 n차 살인을 저지른 연쇄살인마가 나타날 장소를 미리 물색하는 수사관처럼 시목은 논리적이고 계산적으로 굴었다.

 

 

*

 

 

 

여진이 시원시원한 발걸음으로 시목의 검사실을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때마침 원철이 지나가다 여진을 본다. 한경감님.

 

“어쩐 일이야 여긴. 퇴근 시간도 지났는데.”

“아아, 황검사님 데리러 왔죠오.”

 

여진이 장난스레 눈을 찡긋하며 말을 늘려 말하자 원철이 허허, 하고 웃으며 친밀하게 그녀의 어깨를 두드려 준다. 가방을 맨 시목이 다가온다.

 

“황시목이- 요즘 칼퇴네? 다, 한경감 덕분인거지?”

 

여진이 웃고 시목은 화기애애한 두 사람을 한 번씩 보곤 이 자리를 먼저 파하겠다는 의지로 원철에게 고개를 꾸벅 숙인다.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래 데이트 잘 하고. 한경감, 얼른 황검사 데려가 버려. 응?”

 

잔뜩 웃음기 섞인 원철의 말에 여진이 화답하듯 손으로 오케이를 지어 보인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기 무섭게 시목이 들어선다. 시목을 따라 탄 여진이 그의 얼굴을 살짝 살피며 입을 연다.

 

“뭐, 안 좋은 일 있었어요? 왜 이렇게 얼굴이 안 좋아. 오늘은 그냥 들어갈래요?”

 

시목은 엘리베이터의 철문으로 희미하게 비친 제 얼굴을 본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무표정.

 

“저는 그런 일도 그럴 일도 없는 사람인거, 아시잖습니까.”

“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걸어가며 아는 얼굴을 본 시목이 고개를 꾸벅 해보이고, 여진은 시목과 나란히 발걸음을 맞춘다.

 

“기분 안 좋고, 뭐 그런 일말입니다.”

 

여진의 얼굴이 순간 굳어진다. 여진의 차에 다가선 두 사람이 서로를 본다. 평소와 다르게 여진의 침묵이 아닌 여진의 대답이 듣고 싶은 건지 끈질기게 시목은 그녀의 눈빛을 응시한다. 어두운 숲길에서 이리로 오라며 손전등을 흔드는 사람처럼 시목은 여진에게 제게로 오라 손짓했다. 제가 찾은 답으로.

 

“에이. 기분 안 좋은 날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여진의 말에 시목이 한숨을 얕게 쉰다. 쉽게 오는 사람이 아니었지.

 

“사람이 아닌가보죠. 그럼.”

 

시목이 에둘러 말하는 바를 여진은 정확히 알고 있었으나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웃을 뿐 휘둘리지 않았다. 손전등을 들고 이 길로 오라고 하는 사내의 말에 꿈쩍도 하지 않은 여진은 오히려 손전등을 든 사내에게 손짓했다. 거기 아니에요! 여기로 와요!!

 

“있잖아요. 이 차도 검사님처럼 오늘 기분이 안 좋더라고요?”

“...”

“시동이 한 번에 안 걸렸어. 움직이기 싫은 날이었나 봐.”

 

부러 과장되게 하는 말에 시목은 뻣뻣하게 굳은 얼굴 근육을 살짝 푼다. 저 여자의 특기가 또 나오고 있다. 의미부여.

 

“또 있어. 히터가 안 돼. 너무 추워서 으으. 이게 뭐냐면, 이 차가 나 짜증난다, 나 오늘 일하기 싫다, 뭐 이런 걸 주장하고 있는 거지.”

 

여진의 동화 같은 말을 들으며 시목이 차에 올라탔다. 운전석에 오른 여진이 히터 기능을 요리저리 살피더니, 춥죠? 미안. 하고 한껏 미안한 표정이다. 어디로 갈까요? 여진의 물음에 시목이 잠시 고민하다 자기가 운전하겠다며 문을 열고 운전석으로 간다. 떨떠름하게 운전석에서 쫓겨난 여진은 갸우뚱 하는 표정으로 조수석에 앉는다.

 

“오늘 검사님 이상하시네.”

 

시목이 말없이 운전대를 잡는다. 어디 가는 건데요. 경감님 집이요. 시목의 말에 여진이 입을 꾹 다물고 눈썹을 찡그린다. 응? 여진의 의문이 시목에게 채 닿기도 전에 신호가 걸린 차가 멈추어 서고 시목이 여진 쪽을 바라본다. 코트 주머니에서 꺼낸 가지런히 접힌 종이를 여진에게 준다.

 

“저는 경감님께 그렇게 큰 부분을 차지할 자격, 없는 사람입니다.”

 

네가 싫다는 말도 아닌, 당신에게 충분치 않다는 거절의 말은 다른 이에게 들었다면 헛웃음이 나오기 충분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진은 조금의 마음 상하는 기색이 없었다. 신호가 바뀌고 시목이 운전을 시작했으나 여진은 여전히 고개를 돌리고 시목의 옆모습을 본다.

 

“우와, 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에요? 나 그런 사람 아닌데.”

 

웃음기가 잔뜩 섞인 말은 딱딱하리만큼 경직된 기운을 움직였다. 담담한 시목의 목소리가 고요한 운전석에 울려 퍼졌다.

 

“솔직히 전 잘 모르겠습니다. 호감, 사랑, 이런 감정들은 기억조차 안 납니다. 그런 것들이 있던 세월보단 없이 산 시간이 더 긴 탓이겠죠.”

 

여진은 말을 덧붙이지 않고 가만히 듣기만 했다. 시목은 조근조근한 제 말처럼 부드럽게 핸들링을 하며 여진을 힐끔 봤다. 그녀의 말간 얼굴은 화가 났거나, 서운 하거나, 반박하고 싶은 얼굴도 아니었다.

 

“어제 생각해 봤습니다. 이 세상에 나라는 존재를 자신의 세상에 크게 담아 둔 사람이 몇이나 있었을까.”

“저희 부모님. 이창준 검사. 경감님... 저희 부모님께 전 악몽이 된 지 오랩니다. 이창준 검사가 절 선택한 이유는 제 특이함 때문이었겠죠. 사람 같지 않았기 때문에 외압에 흔들리지 않을 테니까요.”

“제 문제를 껴안고 살아야 했던 사람이나, 그걸 이용한 사람이나 끝이 좋지 않았습니다.”

“남의 감정에 뭐라 할 수 없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절 경감님 마음에 그렇게 크게 두지 마십쇼. 더군다나 전 경감님을 좋아할 수도 없으니까요.”

 

좋아할 수 없다는 시목의 말이 여진의 귓가에 사근사근하게 울려 퍼졌다. 그 말 속에 미안함이 적셔져 있는 것만 같았다. 시목의 말이 끝나갈 때쯤 여진의 집에 거의 다다랐다. 더불어 하늘에선 새하얀 꽃송이들을 내려 보내기 시작했다. 여진은 히터가 나오지 않은 차안을 의식해 두 손으로 제 팔을 문지르며 창밖을 바라봤다. 눈 오네. 주차하기가 무섭게 폴짝 뛰어내린 여진은 어두컴컴해진 하늘을 바라보며 가로등 조명 아래 서있었다. 시목이 여진보다는 느리게 내려 차키를 그녀에게 건넸다. 들어가십쇼.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여진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시목은 떨떠름한 얼굴이다. 제가 한 것이 걱정이었던가. 그래서 나 오늘 운전 안하게 한 거 아니에요?충격 받을까봐. 시목은 저도 의식하지 못했던 제 행동이 그런 것을 의미했나, 아리송한 물음을 머릿속에 둥둥 띄었다.

 

“내가 그 분들과 같은 길로 가는 걸 막고 싶은 거잖아요. 당신의 특별한 때문에 괴로워지지 않았으면 하는 거고. 우리 검사님 지인짜 나 걱정 많이 해주네.”

“걱정이든 아니든 달라질 건 없습니다. 아무리 경감님이라도 자길 좋아하지 않는 기계와 평생을 함께 할 순 없을 겁니다. 답답해지실 테고, 지쳐 갈 테고, 짜증나게 될 테니까요. 경감님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부처님이 오셔도 그러실 겁니다.”

“당신이 기계 같은 사람이라 안 된다는 거죠, 그러니까? 날 좋아할 일도 없고?”

“그런 셈이죠.”

 

흥분에 차서 반박을 할 거라는 시목의 초기 예상과는 달리 여진은 반박할 의사도 의지도 없어 보였다. 평소처럼 입을 쭉 빼고 두 손을 자켓 주머니에 넣더니 한 발을 땅에 툭툭 쳤다. 탁, 탁, 탁, 의미 없는 소리가 일정하게 퍼졌다.

 

“좋아요. 다 알아 들었어. 그럼, 황기계씨, 나 좀 안아주지?”

“지금 제 얘기를...”

“알아요. 안다니까. 난 내 차랑 종종 포옹도 하고 그래. 보여줘요?”

 

여진이 진짜로 자동차를 당장이라도 진하게 안을 기색을 보이자 시목이 막아섰다. 하효. 됐습니다.

 

“기계랑 뭘 하든 누가 상관하겠어요. 안 그래? 기계씨는 기계니까 상관없잖아.”

 

시목이 다시 한 번 한숨을 얕게 쉬었다. 눈송이가 굵어지기 시작했고 두 사람의 흑발엔 하얀 꽃이 내려앉았다. 얼른요. 응? 여진의 채근에 시목이 별 다른 대응 없이 나무처럼 서있기만 했다. 보다 못한 여진이 성큼 다가와 그의 팔 사이로 제 팔을 부드러이 밀어 넣었다. 시목은 뻣뻣하게 굳은 채 미동조차 없었다.

 

“황기계씨, 삐빅- 인간 한여진 좀 제대로 안아주시죠.”

 

여진이 부러 기계음처럼 굴자 시목이 할 일 없이 덜렁 내려가 있던 두 팔을 그녀의 등에 어색하게 올렸다. 여진의 턱은 시목의 어깨에 딱 맞닿았다. 편안하게 얼굴을 기댄 여진이 그의 등을 느린 박자로 토닥였다.

 

“있잖아 검사님, 내가 본 만화 중에 기계랑 인간이랑 사랑하는 것도 있다?”

 

여진의 웃음기를 머금은 말에 시목이 별 수 없다는 듯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건 만화 아닙니까.”

 

왠지 모르게 억울한 것 같은 시목의 목소리에 여진은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웃었다. 조용한 어둠 속에 두 사람 곁에 있는 것은 노란 빚뿐이었다. 두 사람은 한참 서로의 숨소리를 엿들었다.

 

“검사님 생각, 다 알았어요. 그니까 너무 속 터지지 마요.”

“아닝데요. 전 속 안 터징니다.”

“미안해하지도 말고요.”

“미안하지도 않승니다.”

 

시목은 눈님과 함께 오신 추위 덕에 발음이 샌 채로 중얼 거렸다.

 

“집 잘 가구요. 어디서 자빠지지 말고.”

“제가 앱니까.”

“나도 데려다 주고 싶긴 한데 내가 준비할 일이 있어서 오늘 좀 바빠.”

“바쁘시면 말씀을 하시지.”

“검사님 의견을 들었으니 나도 준비 해야지.”

“예? 뭘요?”

“반론.”

 

 

 

*

 

 

 

반론을 준비한다는 여진의 말은 틀린 것이 아니었는지 다음날 다시 만난 그녀의 얼굴은 팅팅 부어 있었다. 검사님- 하지만 그녀는 손을 흔들며 반갑게 시목을 맞았다. 지검 돌계단을 내려오던 시목이 여진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얼굴이 왜 그래요? 여진이 머쓱하게 제 얼굴을 쓰다듬었다. 내 얼굴? 아, 잠을 못 자서. 목적지를 정하지 않은 탓에 시목은 우두커니 섰고, 여진이 그의 팔을 이끌었다. 갑시다. 차는요? 시목은 얌전히 따라가며 물었다. 어제부터 한가득 쌓인 눈 덕분에 뽀득 거리는 소리가 쉬지 않고 그들을 따랐다. 차 수리 맡겼어. 오늘 행선지는 검사님 아파트 공원이야. 일단 가요. 아니, 추운데 왜... 시목의 중얼거림에 대꾸 하지 않고 여진은 그를 이끌고 부지런히 걸었다.

 

아파트 안에 위치한 공원은 몇 개의 가로등과 벤치뿐이었다. 우거진 나무들이 적절히 공원을 보듬고 있어 컴컴한 어둠의 기운을 더해주었다. 어제처럼 두 사람은 가로등 밑에 섰다.

 

“미안요, 검사님. 눈 때문에 벤치도 젖어서.”

“추운데 들어가시지...”

“다 내 플랜이에요. 정신 차리고 들으라고.”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까지... 시목은 제가 본 사법시험 2차 문제보다 더 예상이 가지 않아 입을 꾹꾹거렸다. 여진은 비장하게 가방에서 붉은 노트를 꺼내 제 품에 안았다.

 

“검사님이 감정이 없는 기계 같은 사람이라는 거에만 반박하면 되죠?”

“검사님 감정이 얼마나 다채로운지 내가 얘기해줄게.”

 

여진이 노트를 펼쳐 선언문을 낭독하듯 근엄하게 읽기 시작했다. 정말 알 수 없는 여진의 행동에 시목은 눈썹을 움찔 거렸다. 좀처럼 예상이 가지 않는다.

 

“용산서 한여진 경감은 서부지검 황시목 검사를 대상으로 세 가지 실험을 진행하였다.”

 

“실험1. 아, 아니다. 그냥 읽는 게 낫겠어요. 자.”

 

여진이 제 보물마냥 품고 다니던 노트를 펼친 채 내밀었다.

 

 

 

실험 1. 약속 시간에 늦기

목적 : 검사님 화나게 하기!

결과 : 10분 경과 - 전화 1통, 별 다른 변화 없음.

: 25분 경과 - 입을 꾹 다물고 가만히 있음.

: 40분 경과 - 입을 ‘ㅡ’자 모양. 눈썹 간격 약간 좁아짐.

정리 : 입과 눈썹이 아주 묘하게 달라짐..!!

 

 

 

 

시목이 빠르게 훑곤 여진을 봤다. 이게 뭡니까, 라는 얼굴에 여진은 머쓱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 날 디게 늦은 날 있었잖아요. 그 때에요. 사실 나 검사님 다 지켜보고 있었거든. 미안해요.”

 

말도 없고, 전화도 없이 약속에 40분이나 늦은 날을 두 사람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여진이 장난기 없이 미안하다고 하자 시목은 다시 한 번 읽었다. 다음 장도 봐요. 여진의 말이 하얀 눈처럼 사분하고 조용히 내렸다.

 

 

 

 

실험 2. 국밥 맛집 데려가기.

목적 : 기쁨 느끼기(?)

결과 : 말없이 먹기만 함. 내 말에 대답을 느리게 함. 뭐지...?

정리 : 모르겠음... 맛있냐고 물었을 땐 맛있다고 했는데... 음...

 

 

 

 

공판 서류를 보는 것처럼 신중하고 진지한 얼굴로 시목은 한참을 노트 탐독에서 빠져나오지 않았다. 옆에 여진이 있다는 것도 까먹은 것인지 여진은 눈만 깜빡이면서 눈치만 볼 뿐이었다.

 

 

 

 

검사님이 좋아하는 거! 국밥. 고기(돼지고기). 따뜻한 거. 돈까스...

검사님이 싫어하는 거! 시끄러운 곳. 오이. 술. 짠 거..

검사님은 언짢거나, 걱정 되거나 그럼 미묘하게 미간이 좁아지고, 입을 꾹 다문다!

좋으면 말에 반응이 좀 느리고, 말이 더 없어진다.

싫거나, 궁금하거나, 이상한 건 바로바로 말한다. 근데 좋거나, 뭐 이런 건 아무 말이 없는 듯... (내가 예쁘냐고 물었을 때도 말 없었는데...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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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간도, 입도 별 다를 게 없는데 그냥 눈빛이 슬퍼 보일 때도 있다.

어머니 얘기 할 때. 어머니와 아버지 뵙고 왔을 때. 영일재 전 장관님 뵙고 왔을 때. 영검사님 기일에 같이 납골당 갔을 때. 이창준 수석님 기일에.

 

 

 

 

실험 일지부터, Q&A, 괴이하게 생기기까지 한 황시목 인 듯 황시목 아닌 그림들, 다양한 내용들이 꽤 여러 장을 채우고 있었다. 시목은 꼼꼼하고 차분히 읽으며 마지막 장까지 왔다. 묘하게 슬퍼 보인다는 순간들을 차근차근 읊어 보며 제가 슬펐던가, 기억을 더듬었다. 시목의 머릿속으로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던 순간들이었다. 그는 더 이상 말을 이어 갈 수 없이 가슴이 먹먹해 졌다. 반박을 할 수도, 인정을 할 수도 없이 시목은 고개를 떨궜다. 시목이 고개를 떨구는 것을 본 여진은 당황해 얼굴을 내밀고 그를 살폈다.

 

“왜 그래요? 어디 안 좋아?”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시목이 다시 고개를 들어 노트를 접어 한 손에 쥐었다.

 

“어제 이걸 다 하신 겁니까?”

“아뇨. 이건 원래 하던 거고. 어젠 생각을 했어요. 검사님 얘기.”

“무슨, 얘기 말입니까?”

“감정 없다는 검사님 얘기. 내가 다칠 거라는 말. 뭐, 그냥 그런 것들요.”

 

여진이 빙긋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눈 속에 묻힌 신발을 통해 한기가 올라왔지만 두 사람 모두 제 발 밑에 깔린 것이 눈인지, 모래인지 상관할 겨를은 없었다.

 

“어때요. 검사님 기계 아니죠? 사람 맞죠? 응?”

 

여진은 입을 꾹 다물고 얼굴이 조금 굳은 시목을 눈치를 살폈다. 그녀의 밝은 목소리와 달리 시목의 얼굴엔 여전히 확신이 없다. 뿌듯하게 웃는 말간 얼굴에 더 이상 아무런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녀의 진심은 시목이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거대해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섣불리 택하기 어려웠다. 그동안 숱한 거절의 말을 해왔던 시목은 자신이 단 한 번도 ‘잘’ 거절하는 법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도, 해 본적도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감정이 없는 기계라며 그녀를 막아섰던 그의 첫 번째 벽은 여진의 도끼질에 힘차게 흔들렸다. 위태로이 흔들리다 결국 맥없이 쓰러지고 말 것이냐, 아니면 움직임의 여파로 종말엔 어떤 방해에도 무너지지 않는 굳건함이 될 것인가.

 

반론을 펼치는 한여진의 변론은 꽤 임팩트 있어 황시목 검사의 말문을 막아내는 데에는 승리했다. 시목은 다시 평정을 찾고 그녀를 납득시킬 이유를 찾으려 애썼다. 저 붉은 노트의 진위여부를 다시 판단할 필요가 있다. 한여진씨 한 사람의 추론으로 그 것이 사실이라고 결론짓기엔 무리가 있다. 수많은 말들이 시목의 머리에 맴돌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선택받기엔 부족했다. 시목은 핏빛 노트를 쳐다보며 저 안에 있는 것을 다시금 떠올렸다. 저 안에 있는 것들은 정성 말고도 저를 향한 따뜻한 애정이라는 사실은 머리로도 알 수 있었다.

 

내게 정말 이 노트에 적힌 것들이 있을까. 기쁨. 슬픔. 분노. 걱정. 낙담. 애 저녁에 잃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어쩌면, 어쩌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평생 뿌리를 내린 확신의 끝은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붉은 노트 자락에 흔들렸다. 누군가 흔들어 주길 바랐다는 것처럼 세차게 요동쳐 시목은 어지러워 졌다.

 

“저는 경감님의 기쁨을 함께 느낄 수 없습니다. 함께 기뻐해 드릴 수 없어요. 승진을 하고, 범인을 잡고, 다른 좋은 일이 생겨도요.”

“검사님 좋을 때 티 난다니까. 아무 말 안 해도 난 느낌이 딱 와. 우리 검사님 지금 기쁘구나.”

“잘 웃어드리지도 못 하구요.”

“검사님은 정말 필요할 때만 웃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별 일 아니어도 기계적으로 웃겠지만 검사님은 그냥 정말 필요할 때만 웃는 거죠. 가장 확실한 순간에. 가장 기쁠 때. 난 그래서 검사님 웃는 걸 보는 게 좋아.”

 

시목의 담담한 고해는 여진에게 묻는 듯 했으나 실은 모두 저를 향한 질문들이었다. 여진은 꾸며내는 기색 없이 당연한 진리를 읊는 듯 태연 했다. 당신은 이 세상에 일부이며, 내 곁에 서 주기에 지극히 자격이 충족된 사람이며, 정상이라고. 여진은 끊임없이 속삭였다.

 

“혹시, 혹시... 경감님이 죽게 되는 날에도 슬퍼하지 않을 수도... 아니, 슬퍼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시목이 여진의 눈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평소의 시목과는 다른 행동이었다. 법의 테두리 아래에서 단죄하고, 맞서는 데 망설임 없이 당당했던 남자는 감정의 영역에서 일말의 확신과 용기, 자신감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여진이 시목의 한 손을 잡아 제 두 손 안에 꼭 쥐었다. 검사님, 나 봐 봐요.

 

“검사님 정말 슬퍼하더라.”

“예?”

 

여진의 말에 시목이 고개를 들었다. 왠지 그의 어깨가 평소보다 쳐진 것 같이 느껴져 여진은 괜히 눈가가 붉어 졌다. 저 남자의 굽은 등이 신경 쓰인 게 언제 부터였던가. 이제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가방을 메고 한 손엔 꽤 묵직해 보이는 보자기를 든 시목의 구부정한 뒷모습이 선명했다.

 

“영검사님이 죽었을 때. 이창준 수석이 죽었을 때. 그 때, 내 눈엔 검사님 울고 있었어요.”

 

장례식이든, 기일이든 시목은 제가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린 일 따윈 명석한 두뇌에 존재하지 않았다. 저는 울지 않았습니다. 범죄사실을 자백하는 범죄자처럼 왠지 죄스러운 시목의 눈빛은 여진에게 고했다. 저는 울지, 못 했습니다. 여진은 시목의 눈동자를 들여다 보다 그를 향해 한 발자국 다가갔다. 그녀의 한 손이 그의 볼을 감쌌다. 시목은 제지하지도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눈물을 흘려야만 우는 건 아니야, 검사님. 눈물이 떨어져야만 슬픈 것도 아니고.”

 

여진의 눈가는 붉은 기운을 숨기지 못했다. 괴로웠잖아요. 정말 슬펐잖아. 검사님... 힘들었잖아요. 슬픔을 슬픔이라 인지하지 못하는 제 앞의 남자가 가엾었다. 꽤 이성적이라 자부해 왔던 여진은 시목의 무딘 감정이 모조리 옮겨 오기라도 한 것인지 차오르는 감정 덩어리에 어찌 할 바를 몰라 씩 웃었다. 촉촉한 눈가와 대비적인 입가에 시목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거, 동정입니다.”

 

여진의 붉은 색 눈가는 시목에게 다른 가능성을 불러왔다.

 

“나는요, 검사님이 추운 데 구부정하게 걷고 있으면 그게 그렇게 슬프다? 당신 등짝을 한 대 쳐서 등을 펴주고 싶고, 당신 옆에서 걷고도 싶어요. 당신이 입 꼬리를 살짝 올려서 웃으면 떨리고, 당신이 말없이 맛있게 먹고 있는 걸 보면 기분 좋아요.”

 

“그래요, 그 안엔 동정도 있어요. 그치만 나는 검사님을 동정해서 사랑한다고 하는 게 아니야.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의 슬픔을 껴안아주고 싶고, 당신의 슬픔에 내 가슴 아픈 거예요.”

 

저 사람은 제 감정에 확신이 있구나.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한 마디, 한 마디를 뱉어 내는 여진을 보며, 사랑을 입에 담는 그녀를 보며, 시목은 생각의 바다에 잠겼다. 아득하고 깊은 푸른 물에 맥없이 끌려 들어가는 사람처럼 침전했다.

 

“경감님이 제 감정까지 확신하실 수는 없으실 겁니다. 설령 제게 감정 같은 게 있대도, 제가 경감님을 좋아하는지, 사랑하는지, 단순한 동료앤지, 지금도, 앞으로도 확신하실 수 없을 겁니다. 확신 할 수 없는 감정에 불안하실 거고요.”

“저도 알지 못하는 걸 경감님께서 무슨 수로 아시겠습니까.”

 

시목의 긴 말의 끝에 실은 내뱉지 못한 말이 담겨 있었다. 내가 당신을 좋아합니까? 물음표가 진하게 띄워진 의문이었다. 시목 또한 답을 찾지 못한 질문이었다. 여진은 지금껏 막힘없이 대답해 오던 것과 달리 침묵을 지켰다. 시목은 여진의 침묵에 그녀의 손 안에 있는 제 한 손을 빼냈다. 여진은 시목의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눈썹 한 올, 눈가의 주름, 눈동자의 빛깔, 시목의 얼굴 어느 하나도 빼놓지 않고 응시했다. 시목은 진득한 여진의 눈빛에 가슴이 멍멍하고 답답해 졌다. 속이 불편한 것만 같은 답답함이 가슴을 꽉 채웠다. 뱃멀미처럼 울렁이는 속에 그는 눈을 깜빡거렸다. 여진이 그런 그의 모습까지 모두 놓치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검사님한테 관심이 많다고 해도, 검사님 감정까지 확신할 수 없는 거겠죠. 추측은 해도 확신은 못해요. 나도 인정해요, 그건. 검사님조차 확신하지 못하는 걸 내가 할 순 없는 거겠죠.”

 

여진이 희미하게 웃었다.

 

“일을 시작한 후로 이 세상, 아니 내 세상은 많이 달라졌어요. 천진한 얼굴로도 새카만 거짓말을 하고, 사람인 것 같지 않는 범죄를 저지르고, 착한 사람들이 다치고. 내 하는 일이 좋았지만 한편으론 끔찍했어요. 어제까지 환하게 웃었던 영검사님이 죽고, 같이 일하던 사람은 참고인을 무자비하게 때리고, 또 누구는 내가 찾아 헤매던 범인이고, 그토록 의심하던 이창준 수석이 모든 증거를 남기고 가셨을 때, 내 세상이 너무 흔들려서 이 일 다 때려 치고 싶었어요. 정말로.”

 

“내 세상은 이제 내 부모님조차도 의심할 수밖에 없어요. 그치만 흔들리는 내 세상에 유일하게 검사님에 대한 확신은 있어. 검사님은 끝까지 그 자리에 있어 주리라는 믿음. 당신이 있는 곳이 옳은 곳이라는 믿음. 그 모든 걸 확신해요.”

 

“이 세상에 유일한 검사님에 대한 확신은 내 사랑에 대한 확신이기도 해요. 내 소신이자 신념인 검사님의 곁에 있고 싶고, 곁에서 웃고 싶어요.”

 

시목이 애초에 원하던 답이 아니라는 것은 그와 그녀,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시목은 이제 제 가슴이 답답하다 못해 쿵쾅거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일렁임에 시목은 어지러워져 손바닥으로 제 가슴팍을 꾹 눌렀다. 그가 숨을 몰아쉬자 여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의 안색을 살폈다. 혹여나 이명이 온 걸까.

 

“괜찮아요? 이명이에요? 병원 갈까? 약은요?”

 

괜찮다는 시목의 말에도 여전히 잔뜩 찡그린 인상을 펴지 못한 여진이 당장이라도 병원을 가자며 그의 팔을 이끌었다.

 

“검사님 아프라고 한 거 아녜요. 그니까, 이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으니까, 얼른 병원부터 가요.”

 

제가 준비한 모든 것들과, 제 마음이 시목에게 스트레스였을 것이라고 생각한 건지 여진은 불안한 얼굴로 중얼 거렸다. 그런 여진의 손을 붙잡은 건 시목의 커다란 손이었다.

 

“정말 괜찮습니다. 그냥, 가슴이 좀 답답해서 그럽니다.”

 

시목의 얼굴이 다시 평안해지고 여진을 안심시키려 말을 쏟아내자 여진은 그제야 제 얼굴 근육을 이완시켰다.

 

“전 잘 모르겠습니다.”

 

추상적이고 뭉뚱그린 시목의 말에 여진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그냥, 그냥요, 인정해 봐요. 간단하게. 검사님의 그 ‘다른 마음’에 이름을 하나씩 붙여 보는 거죠. 방금 검사님이 느낀 심장의 떨림부터 사랑이라고 해요.”

 

시목은 여진이 제 뇌구조를 처음 그렸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 시목은 제게 고작 있는 것이 우월감이라고 자조적으로 인정했었다. 생각해 보면 그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있던 마음들에 우월감과 ‘다른 마음’이라는 이름을 정의 내린 사람은 여진이었다. 새삼 그때나 지금이나 의미 부여에는 특출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이름 짓겠다는데 누가 뭐라 그러겠어요. 검사님이랑 내가 사랑이라면 사랑인거지. 안 그래요?”

 

여진이 다시금 장난스런 얼굴로 말했다. 시목은 말없이 여진을 봤다.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사랑의 시작인거죠.”

 

여진이 무겁지 않은 목소리로 가볍게 툭 뱉어냈다.

 

“검사님이 우리 특검 때 그랬잖아요, 날 뒷조사 하지도 않았고, 할 일도 없다고. 그날 집에 가서 자려고 누웠는데 그 말이 디게 좋더라고요. 검사님의 그 생각, 그 믿음. 우리 그것부터 사랑으로 봐요.”

 

모든 사람들을 용의선상에 올려놓았지만 여진만은 의심하지도, 의심 할 일도 없다고 생각했던 시목의 판단은 어떻게 보면 근거 없는 것이었고, 순전히 그의 직감에 의한 것이었다. 시목은 이제 진심으로 여진이 하는 말들이 맞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례 없던 여진에 대한 신뢰는 사랑이었을까. 사랑일까.

 

시목은 여진을 향해 성큼 다가가 그녀를 품에 안았다. 여진이 순간 놀라 눈을 끔벅이다가 제 두 팔로 포근하게 그를 안았다. 그녀를 안은 이유를 시목은 스스로에게 물었지만 쉽사리 답할 수 없었다. 다만 알 수 없는 제 마음이 팔과 다리를 조종했을 뿐이었다. 이 마음도 사랑인건가. 제 결론이 퍽 여진의 사고방식과 닮은 것 같아 시목은 옅게 웃었다.

 

“혹시, 아이를 낳게 된다면 저랑 비슷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시목이 여진을 안은 채로 웅얼거렸다. 여진이 푸시시 웃었다.

 

“어머, 벌써 애 갖을 생각을 하는 거예요? 우리 검사님 생각보다 급하시네.”

“그런 거 아닝니다.”

“크흡. 알겠어요. 난 검사님 같은 아들도 좋고, 딸도 좋아. 감정엔 무디겠지만, 그치만 그 것도 하나하나 이름 지어가면 되지. 내가 잘 하는 거잖아요.”

 

“우리에게 아이가 생겼다는 말을 하셔도 남들처럼 기뻐하지 못 할 수도 있습니다.”

“흐흥. 우리? 우리, 그 말 진짜 좋다. 검사님 기쁘면 아무 말도 안 한다니까 그러네. 난 다 알아요.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남들처럼 행복하게 해준다느니, 울지 않게 한다느니, 그런 말씀은 못 드리겠습니다. 어떻게 하는 줄도 모르고요.”

“괜찮아요. 그런 게 자신 있는 사람들은 다 허풍쟁이야. 그냥 검사님은 사소한 것도 내게 얘기해 줘요. 그럼 내가 하나하나 설명해 주고, 열심히 이름 붙여 줄게. 할 수 있겠어요?”

“그건...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남들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우린 우리 길을 걸어 봐요. 수사를 하고, 범인을 잡고, 밥을 먹고, 있었던 일들을 얘기하고, 그냥 그렇게요. 특별한 거 없이.”

“노력, 해보겠습니다. 아직 뭔지 잘 모르겠지만.”

“그런 태도, 아주우- 좋습니다, 황 시목 검사님.”

 

여진이 웃음기로 축축한 말을 뱉으며 시목의 등을 아프지 않게 콩콩 두드려 댔다. 흐흐, 하는 웃음소리가 시목의 온 몸을 진동케 했다.

 

“그럼 제가 먼저 사랑 한 겁니까, 아님 경감님이 먼접니까?”

“그야, 당연히 검사님 먼저지.”

“왜요.”

“검사님이 나 뒷조사 할 일 없다고 했을 때가 당근 먼저죠. 난 훠어얼씬- 뒤에야 검사님 믿었어.”

 

여진이 시목에게서 몸을 떼어 내고 제가 더 늦게 좋아했다는 논리를 펼쳤다. 누가 먼저 서로를 마음에 담았는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여진이 시목의 목을 두 팔로 감으며 그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시목이 그녀의 허리를 감았다. 제 품 안의 맑은 여진의 눈동자를 뚫어 질 듯 쳐다보던 시목이 입을 열었다. 여진의 눈동자에 비친 제 모습이 이질적이었다. 다른 사람을 통해 나라는 사람은 보는 것이 처음이다 싶을 정도로 생소했다. 그녀의 눈빛 속에 황시목이라는 사람을 집요하게 쳐다봤다. 그녀의 안에 있는 그는 참 따뜻한 사람인 건만 같았다.

 

“지금 이 느낌은... 이 마음은...”

“키스요.”

“이 마음은 키스하고 싶은 마음인 겁니까?”

“그럼요.”

 

여진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목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곤 제 얼굴을 조심스럽게 그녀에게로 붙였다. 여진의 눈이 감기는 것이 보이고 시목 또한 따라하듯 눈을 감았다. 말랑한 감촉이 곧바로 느껴졌다. 여진은 시목의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차례로 핥으며 모두 축축해질 때까지 집요하게 굴었다. 시목이 숨을 쉬려고 할 때를 놓치지 않고 여진의 혀가 부드럽게 그의 영역을 침범했다. 시목은 그녀의 막힘없는 진입을 쫓으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건 사랑이구나.

 

물론 이성으로 판단 가능한 명백한 증거 따위는 없었지만 그냥 왠지 확신이 들었다. 이게 바로 사랑이라고.

 

 

 

 

 

 

 

 

에필로그

 

 

 

“검사니이임.”

 

여진이 말을 잔뜩 늘려가며 시목의 검사실에 들어섰다. 서류에 빠져 있던 시목이 고개를 들고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골무를 빼자 여진이 곁으로 다가온다.

 

“점심은 맛있게 먹었어요?”

“예.”

“뭐 먹었는데? 또, 국밥?”

“아뇨. 오늘 검사장님이랑 같이 점심해서 다른 거 먹었습니다.”

“오. 뭐요?”

“돈까스요.”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단어에 여진이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나이프를 쥐고 돈까스를 썰고 있을 검정색 양복을 입은 원철과 시목의 조합을 얼떨결에 상상했다. 잘 어울리네 뭐.

 

“둘이서만요?”

“아뇨. 서검사님도 같이 먹었습니다. 요즘 부쩍 자주 같이 부르십니다. 검사장님께서.”

 

서동재도 같이? 정말 웃긴 그림이다. 여진은 세상 즐거운 얼굴로 휘바람을 부는 것처럼 앙 다문 입을 내밀었다.

 

“근데, 아직 퇴근 시간도 아닌데 어쩐 일이십니까?”

 

시목의 물음에 여진은 약간 상기된 얼굴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주머니에 넣은 손에는 작은 종이 하나가 잡혔다.

 

“새로운 소식이 있어서요.”

 

여진이 오른손을 주머니에서 꺼내 턱 시목의 테이블 위로 올려놓았다. 생각지 못한 소음에 시목이 약간 움찔했지만 곧 그녀의 손이 지나간 자리로 시선이 이동했다. 그녀의 오른손이 지나간 자리엔 작은 종이 하나만 남겨져 있었다. 그것을 제 눈 가까이에 가져다 댄 시목은 한참 말이 없었다. 여진은 시목을 유심히 살폈다. 보채지 않는 조용한 기다림의 시간은 꽤 길었다.

 

“죄송합니다. 이건, 그 때...”

 

시목은 답지 않게 말꼬리를 줄였다. 여진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덮치듯 시목의 위를 올라탔던 그 날을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명확하게 예외는 그 날 뿐이었으니까. 따지고 보면 여진의 지분이 컸던 사건이기도 했다.

 

“그날은 뭐, 내 탓이 더 크니까, 됐고. 그것보다 지금 어때요?”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라, 당황스러운 것 같습니다.”

 

어떠냐는 여진의 물음에 시목이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그간 여진이 세심하게 훈련시킨 결과이기도 했다. 당황스럽다는 말이 시목의 입에서 나오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었지.

 

“심장이 조금 더 빨리 뛰는 것 같기도 하고. 가슴이 먹먹합니다. 아주 조금요.”

 

여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목은 여진의 눈동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저..., 기뻐, 보입니까?”

 

조심스럽게 물은 시목의 질문에 괜히 여진이 멍멍해졌다. 무딘 제 감정에 상처 받지는 않을까 조심하는 그의 기색이 물씬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여진이 당연하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이자 시목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황검사님 아빠 되는 거 축하해요.”

“아빠요...?”

“전 아가를 낳기로 결정했어요. 검사님이 격렬하게 반대하지 않는 한.”

 

시목은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말이 없었다. 여진의 안색을 살피는 시목의 눈동자가 조금 불안해 보이기도 했다.

 

“이유, 여쭤도 됩니까? 그렇게 결정한.”

“우선 나는 적당한 경제력이 있죠. 철밥통 경찰 공무원이기도 하고. 둘째는, 검사님 아이를 낳고, 키우고 싶어요. 그게 끝.”

 

시목은 여진의 간결하지만 확실한 답변에 숨은 의중을 알아챘다. 제 동의 여부와 상관없게 거침없이 말하는 여진의 어조에서 그 의중의 확신을 얻었고. 아빠 되는 걸 축하한다는 여진의 말 속에 제 남편이, 제 배우자가 된다는 의미는 없었음을 깨달았다.

 

“아빠만 되는 겁니까?”

“그렇죠. 아직은.”

 

여진의 담백한 대답에 시목은 자리에서 일어서 여진의 곁으로 걸었다. 사무실은 조용했다. 그는 여진의 앞에 가까이 서서 입술을 앙 다물었다.

 

“원래 저는 아이 갖는 데 회의적입니다. 저와 다를 거라는 보장도 없고요. 그게 얼마나 많은 사람을 괴롭게 하는 지 아니까요.”

 

여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고백했던 순간부터 연애하는 기간 동안 내심 느끼고 있는 부분이었다. 그에게 쉽지 않으리라는 걸 예상했으니까. 여진은 그렇기 때문에 더욱 제 아이의 아버지 자리와 제 배우자 자리를 동일 선상에 놓지 않으려 했다. 그건 철저히 다른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했으니까. 여진은 이번에 나올 거절을 백번은 더 상상하고 이 자리에 왔다. 웃고 있는 입가에서 느껴지는 묘한 떨림까지는 숨길 수가 없었다.

 

“저는 크게 변하지 않을 겁니다.”

 

변하지 않을 거라는 시목의 말을 여진은 거절로 받아들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그래도 기대 되는 것 같습니다.”

“... 뭐가요?”

“아이의 얼굴이 경감님을 닮았을지, 딸일지, 아들일지, 뭐 그런 것들요.”

 

여진이 시목의 말에 함축된 정확한 의미를 찾지 못해 방황했다. 시목이 그녀의 두 손을 잡아 제 큰 손 안으로 품었다.

 

“용기 내 보고 싶습니다. 경감님이 제게 오신 것처럼.”

 

“이번엔 제가 가겠습니다.”

 

“물론 거북이처럼 느릴 지도 모릅니다.”

 

덧붙여진 말에 여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답지 않은 비유였다. 거북이라니. 그에게서 나온 단어가 이질적이면서 귀엽게 여겨져 여진은 그의 입술에 뽀뽀를 쪽, 하고 떨어졌다.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단호하면서도 묘하게 결의에 가득 찬 시목의 말이 재미있어 여진이 한 번 더 입술을 붙였다 떨어졌다.

 

“얼마나요?”

“사법시험 공부할 때보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으흐흐. 정말요? 뭘 얼마나 한다는 거야. 벌써 기대되네.”

 

여진의 눈동자에 가득 찬 붉은 빛 열기에 시목은 긴장된 안면 근육의 힘을 풀었다. 그리고 입가에 힘을 줬다.

 

“어어? 지금 웃는 거죠?”

 

시목은 앙 다문 입술로 미소 같은 웃음을 지었다. 남들에겐 옅은 미소겠지만 시목에겐 박장대소 수준이라는 것을 두 사람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웃어야 할 거 같아서요.”

 

미소 짓던 시목이 돌연 입꼬리를 내리고 여진에게 심각하게 물었다.

 

“혹시, 이거, 거짓말입니까?”

“잉?”

“지난번에 3번 실험...”

 

아아, 그거. 시목의 하는 말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여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험 3번을 명목삼아 거짓말 했다가 서동재의 가벼운 입놀림에 서부지검 전체에 퍼졌던 풍문을 두 사람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한 번 당한 게 선명하게 떠올랐는지 시목의 얼굴에 왠지 모를 불신이 느껴졌다.

 

“거짓말은 무슨. 이번엔 진짜야. 키스나 해줘요. 아가가 아빠 보고 싶데.”

“지금도 보고 계시는데요.”

“에이 진짜. 그냥 해요!”

 

시목이 연하게 웃으며 여진의 두 볼을 잡았다. 가볍게 붙였다 떨어지는 입술의 감촉이 부드러웠다. 그리고 다시금 시목이 다가왔다. 무겁지 않게 다물린 입술을 먼저 열어낸 시목은 여전히 눈을 뜨고 있는 채였다. 시목은 입술을 움직이며 눈을 감고 집중하는 여진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꼬리가 아래로 휘어져 있었다.

 

숨이 찬 여진이 뒤로 물러서자 시목이 돌연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여진은 당황해 버둥거렸지만 시목은 개의치 않고 제 한 손을 여진의 배 위에 올렸다. 콩알만 한 녀석이 어디쯤 있을까. 시목은 잠시 헤아리다 여진을 한번 올려다봤다.

 

“안녕.”

 

여진 자신에게조차 잘 해주질 않는 반말을 이렇게 듣게 될 줄 몰랐던 여진은 새삼 감동하고 말았다. 황시목의 반말을 듣다니.

 

“반가워. 아빠야.”

 

잔잔한 목소리에 담긴 떨림에 여진은 입꼬리를 잔뜩 올렸다. 살면서 이런 감정은 단연컨대 느껴본 적이 없었다. 청승 안 떨려고 애썼는데 눈가에 액체가 차오를 것 같아 애꿎은 주먹만 불끈 쥐었다. 제 앞에 있는 이 남자가 참 고마웠고, 참..., 여진의 따뜻한 가슴은 말을 잇지 못하고 벌벌 떨리기만 했다. 어떤 표현이 이 마음을 드러낼 수 있을까. 어떡해. 나 이 남자 정말 사랑하나봐. 새삼스러운 주접이 여진의 온 몸을 강타했다. 결국 여진은 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얼굴을 감싸는 여진을 보며 시목은 제 마음의 형태를 깨달았다. 제 마음은, 이 사랑은 잔잔한 강물과 같았다. 뙤약볕에 장렬 하는 햇살도 아니었고, 거칠게 딱딱한 바위를 침식시키고 마는 바닷가 파도도 아니었다. 다만 흐르는 듯 아닌 듯 잔잔한 물살 같았다. 결국 종착지에 닿고야 마는 강물. 그는 제 종착지가 이 곳, 한 여진의 곁이었음을 비로소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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