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일의 너와, 너의 내일을
요플레 @_YoPlain
스르륵, 정신이 깨어남과 동시에 시목은 천천히 눈을 뜬다. 눈꺼풀이 가벼운 걸 보니, 출근을 알리는 알람보다 먼저 일어난 게 아니라 휴일을 맞은 것이 확실하다. 습관적으로 돌린 고개를 따라 시야에는 여진이 들어찬다. 격렬했던 어젯밤과는 달리, 평온하게 자고 있는 오늘 아침의 여진이 새삼 사랑스러워 시선을 고정한다. 자신의 팔로 상체를 지탱하고 여진을 내려다보는 시목의 눈빛이 부드럽다. 손가락을 뻗어 여진의 흐트러진 앞머리를 정리해준 시목은,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빠져나온 후 여진에게 다시 이불을 덮어준다. 시목은 건조한 시선으로 방안을 한번 훑고, 어젯밤의 다급함이 묻어나는 자신과 여진의 옷가지를 주워 개키기 시작한다. 깔끔하게 개어 서랍 위의 한쪽에 그것들을 놓아두고, 편한 홈웨어를 꺼내 입은 그는 창가로 다가가 평소대로 커튼을 젖힌다. 어두웠던 방 안으로 햇빛이 쏟아져 들어옴과 동시에 방바닥에는 시목의 그림자가 짙게 새겨진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아침 햇살이 가득한 하늘을 바라보던 시목은, 세상 모르게 자고 있는 여진에게로 시선을 옮긴다. 티셔츠와 닿으면서 쓰려오는 등을 느끼며 그는 오늘 아내의 손톱을 정리해주겠노라 다짐한다. 경감이라는 직위를 단 아내는 최근 몇 주간 골치 아팠던 사건에만 신경 쓰느라 손톱이 자라는 것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애정 어린 한숨을 내쉰 시목은 여진을 향한 시선을 거두고, 슬리퍼에 발을 꿰어 넣고 주방으로 나가 찬 물을 한 컵 마신다. 찬 물로 남아있던 졸음까지 쫓아낸 시목은, 가볍게 씻고 나온다. 그리고는 거실 테이블에 기대 세워져 있는 자신의 백팩에서 어제 퇴근 직전까지 잡고 있었던 서류와 펜을 꺼내고, 거실 테이블 앞에 앉는다. 오전 9시가 조금 덜 된 참이다. 어차피 여진이 일어나려면 두어 시간은 기다려야 할 것이다.
뻑뻑해지는 눈가를 느끼며 고개를 든 시목의 시선이 시계로 향한다. 오전 11시가 거의 다 된 시간이다. 능숙한 손길로 서류와 펜을 정리해 백팩에 도로 넣은 시목은 일어나 침실로 향한다. 다시 덮어준 것이 무색하도록 이불을 밀어내 끌어안고 자고 있는 모습이 귀여워 미소를 머금은 그는, 침대에 손을 짚고 앉아 여진을 내려다본다. 그리곤 이마에 쪽, 하고 입을 맞추고 여진의 반응을 기다린다. 입맞춤 한 번에 반응이 없자 두 번, 세 번 연달아 이마에 입술을 맞댄다. 잠을 깨우는 입맞춤에 여진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웅얼거린다. “네, 네.”라고 대답하며 두 팔로 여진의 상체를 일으킨 시목은,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일어나세요,” 라고 속삭인다. 그리고 시목이 부엌으로 나가 여진이 마실 물을 따르는 동안, 이불이 흘러내리면서 피부에 와 닿는 찬 공기를 느낀 여진은 이불을 끌어안고 다시 털썩 눕는다. 그 포근함에 잠시 파묻혀있던 그녀는, 잠이 서서히 깸을 느끼며 상체를 벌떡 일으키고 침대를 빠져나온다. 뻐근한 몸을 느끼고 버릇처럼 스트레칭을 하면서, 그녀는 남편이 옷장 서랍에 잘 개어놓은 홈웨어를 꺼내 대충 걸쳐 입는다. 어느새 걸어 나와 눈을 감은 채로 자신에게 폭 파묻힌 여진을 감싸 안은 시목은, 습관적으로 여진의 허리를 마사지하듯 주물러주면서 물이 가득 담긴 컵을 식탁 한가운데로 밀어둔다. ‘검사님...’을 시작으로 가벼운 잠투정을 부리는 여진의 목소리가 갈라져 있는 것이 걱정되었지만, 그럼에도 여진의 머리칼과 헐렁한 티셔츠 너머로 언뜻 보이는 자국들을 간밤에 새겨놓았다는 것은 꽤나 만족스러운 시목이다. 그래서 그는 그저 품에 안긴 여진을 조용히 도닥거리며 부은 입술에 입 맞추기를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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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낮이라 그런가. 재밌는 것도 안 하네요.”
“네.”
소파에 나란히 앉아 의미 없이 TV 채널을 돌리다, 제 무릎을 베고 털썩 눕는 여진에 시목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검사님, 케이블 그냥 취소할까요?”
“케이블이요?”
“네. 잘 보지도 않잖아요, 돈 아깝게.”
“가격이 많이 다른가요.”
“시간 지나서 모아보면 적은 돈은 아니겠죠? 근데, 검사님이 신청해놓고 잘 몰라요?”
“설치할 때 해 준 대로 쓰고 있어서요. 잘 모릅니다.”
“아아, 그랬구나. 뭐, 사실 챙겨 보는 것도 없잖아요 우리.”
“네.”
“가끔 영화 틀어주는 건 볼만 하긴 한데... 시간이 없기도 하고.”
“네.”
“그럼 이번 달은 그냥 두고 다음 달에 내가 취소할게요. 괜찮죠?”
“네. 그러죠.”
여진은 쥐고 있던 리모컨을 들어 TV를 끈다. TV 속 대화가 끊기자 거실이 고요해진다. 거실에 들어선 적막에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낀 그녀는, 리모컨을 놓고 테이블에 있던 만화책을 집는다. 여진의 손길은 만화책 종이를, 시목의 손길은 여진의 머리칼을, 여진의 눈길은 만화책 속 주인공에게, 시목의 눈길은 주인공에게 집중한 여진에게로 향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신혼부부의 잔잔한 주말 낮 분위기를 방해한 것은, 그 누구도 아닌 여진의 배에서 난 꼬르륵 소리다.
“... 배고프셨나봅니다.”
“으응... 그러게요.”
“읽고 계세요, 제가 밥 차리겠습니다.”
“우와, 진짜요? 나야 좋지. 근데 뭐, 먹을 게 있어요?”
“별 건 없지만... 볶음밥 정도는 할 수 있을 겁니다.”
“진짜? 다행이네. 그럼 나 기대할게요?”
여진의 웃음기 어린 말에 시목은 그저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 주방으로 향하고, 그새 몸을 뒤집어 엎드려 누운 여진의 시선은 펼쳐놓은 만화책이 아닌 시목을 향한다. 음식이나 맛과 같은 먹는 것에 그리 관심이 없는 시목이기에, 요리라는 것에 대해 아주 문외한이었다. 때문에 주방 도구 다루는 것조차 미숙했던 그인데, 결혼 후 나름 여진에게 요리를 해 주겠답시고 몇 번을 연습하더니 이제는 그 폼이 퍽 능숙하다. 앞치마를 메고 냉장고에서 야채를 꺼내 씻는 시목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여진의 입가에는 미소가 맴돈다. 어느새 만화책을 덮은 여진은 턱을 괴고 남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야채를 가지런하게 다진 시목은, 일전에 먹고 반절이 남은 햄도 마저 다진다. 기름을 두른 팬에 재료를 털어 넣은 그는 냉장고를 열더니, 슬며시 인상을 찌푸리고는 계란 한 알을 꺼낸다.
“계란프라이는 내가 할게요, 검사님.”
별안간 들려오는 여진의 목소리에 시목의 시선이 뒤로 향한다. 어느새 여진은 시목의 옆에 와 있다.
“만화책 읽고 계시던 거 아니었습니까?”
“으응, 남편 요리하는 거 보는 게 더 재밌더라구. 이건 내가 할게요. 그거 마저 볶아요, 타겠다.”
“... 네.”
여진의 ‘남편’ 호칭에 시목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간다.
“근데 계란은 왜 하나만 꺼냈어요?”
“하나밖에 안 남아서요.”
“아, 계란도 다 먹었구나. 반씩 먹죠, 뭐.”
“아닙니다. 경감님 드세요.”
“엥? 볶음밥에 계란프라이를 안 먹겠다구요?”
“전 괜찮습니다. 그리고 경감님, 반숙으로 드시는 거 좋아하시잖아요.”
“아니, 그렇기는 한데-.”
묵묵히 야채를 볶다가 팬에 밥을 넣는 시목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여진은, 손에 쥔 계란을 슬쩍 보고는 입술이 말려 들어가도록 입을 꾹 닫는다.
“검사님, 잠시만요.”
프라이팬에 꽂혀있던 시목의 시선이 여진에게로 향하자, 여진은 계란을 까서 시목이 쥔 팬에 넣는다. 시목의 눈빛이 의문조로 바뀌어도 여진은 그저 웃는다.
“아니, 그냥. 볶는 거 보니까 갑자기 계란볶음밥이 먹고 싶어서요.”
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시목은 또다시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시선을 다시 프라이팬으로 옮긴다. 시목이 계란이 눌어붙지 않도록 저어가며 볶는 동안, 여진은 그릇 두 개와 수저를 꺼낸다.
“경감님, 조심,”
“아, 네.”
여진이 몸을 피하면, 시목이 그릇에 밥을 옮겨 담는다. 언뜻 엉성한 티가 보이기는 하지만 따끈해 보이는 것이 꽤나 먹음직스럽다.
“잘 먹겠습니다-.”
여진의 말을 끝으로 집 안은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로 채워진다. 여진은 정말 배가 고팠던 것인지, 훨씬 일찍 일어난 시목보다도 야무지게 밥을 먹는다.
“배 많이 고프셨습니까?”
“네, 그랬나봐요. 한동안 제대로 챙겨 먹지도 못했으니까.”
“그렇습니까. 좀 더 일찍 차릴 걸 그랬네요.”
“에이, 아니에요. 잘 먹었어요! 설거지는 내가 할게.”
“아닙니다, 쉬세요.”
“이거 얼마나 된다고 그래요! 요리도 검사님이 했는데. 이 정도는 내가 할게요.”
“... 네, 그럼.”
여진이 물러서지 않을 걸 아는 시목의 어깨가 가볍게 으쓱인다. 빠른 손길로 그릇을 헹구고 거품을 내는 여진을 뒤로하고 시목은 냉장고에서 물을 꺼낸다.
“아... 물도 없네.”
“물이요? 벌써 다 마셨어요?”
“네.”
“흠-. 지금 배달시켜도 바로는 안 오잖아.”
“네. 장 보러 가야겠네요. 제가 갔다 오겠습니다.”
“응? 아냐, 같이 가요. 뭐 그게 힘든 일이라구.”
“네, 그럼. 차 가지고,”
“에잉, 그냥 걸어가죠. 멀지도 않은데. 산책도 하고?”
여진의 말에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시목이었다. 어느새 설거지를 끝낸 여진이 고무장갑을 벗고 화장실로 들어가는 걸 눈으로 확인한 시목은, 옷장 서랍에서 편한 외출복을 꺼내 갈아입고 화장실 문 앞에 여진의 옷을 놔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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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효, 경감님. 그렇게 보는 것마다 드셔서 이따 저녁은 어떻게 드시려고 그러십니까.”
“아이, 왜요. 이렇게 먹어봐야 맛도 알고 돈 낭비도 안 하죠.”
“... 네.”
시목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여진이 눈을 못 떼고 있는 냉동만두를 집어 카트에 담는다. 여진은 생긋 웃으며 감사하다는 시식 직원에게 목례를 하고, 만두 하나를 더 집어 시목의 입에 갖다댄다. 시목은 못 이기는 척 만두를 받아먹고 우물거리며 나쁘진 않다는 생각을 한다.
“아, 물 담아야죠. 물하고... 라면도 좀 살까.”
여진은 카트 옆부분을 잡고 걸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시목은 그저 카트를 끌면서 여진이 이끄는 방향을 따른다.
“물은, 일단 1.5 하나만 살까요? 어차피 배달 올 거니까? 무겁기도 하구.”
“네, 그러죠.”
시목이 매대의 생수통을 카트로 옮기면 여진의 시선이 생수통을 쫓는다. 묵직한 생수통이 카트에 자리 잡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 그녀는 다시 머릿속으로 사야 할 물건들을 읊는다.
“검사님, 집에 뭐 아무것도 없죠?”
“네, 캔도 없습니다.”
“흐음-.”
캔 햄을 담으려고 발을 옮기던 여진을 멈추게 한 것은 생선 코너에서 들려오는 우렁찬 목소리다. 주말 특가로 초밥이 세일 중이라는 말을 들은 여진과 시목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친다.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목의 시선에 여진은 또다시 생긋 웃는다.
“저녁은, 초밥에 맥주 한 잔 어떠십니까 검사님?”
여진의 웃는 얼굴을 바라보던 시목은 못 이긴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시선을 내리깐다. 시목은 대답이 없었지만, 이미 둘의 발걸음은 생선 코너로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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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님, 안 무거워요? 나눠 들자니까.”
“괜찮습니다.”
“에이. 그래도 그거, 생수병은 나 줘요.”
여진은 시목이 거절하기도 전에 장바구니에서 생수병을 꺼내 안아든다. 그리고는 무언가 불만을 표하려는 듯 살짝 꿈틀거리는 시목의 눈썹과 입술에 선수를 친다.
“아유, 편하게 손 잡고 가고 싶어서 그래요-.”
여진의 말에 시목의 입술이 꾹 다물리고, 그런 시목이 귀엽다는 듯 여진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시목의 손에 깍지를 낀다.
“아 맞다. 검사님, 우리 그냥 정수기 하나 들일까요?”
“... 정수기요?”
생각지도 못한 가전제품에 시목이 갸우뚱한다.
“네. 아무래도 둘이 사니까, 혼자 살 때보다 물도 많이 먹게 되잖아요. 요즘은 대여 시스템도 잘 돼 있대요. 장 형사님도 정수기 대여 신청했다던데. 되게 편하다나 봐요, 얼음도 나오구.”
“그렇습니까.”
정수기 이야기를 시작으로, 여느 때와 같이 여진이 말하고 시목이 맞장구치는 그들의 대화가 시작된다. 거의 다 져 가는 노을과 켜지기 시작하는 가로등 아래서, 손을 꼭 잡은 두 사람은 그렇게 집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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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딸기 진짜 달다. 잘 샀는데요?”
여진이 젓가락에 꽂은 마지막 딸기를 입에 넣자, 시목은 초밥이 담겨 있던 플라스틱 용기와 함께 빈 그릇과 젓가락을 싱크대에 가져다 넣는다. 플라스틱 용기를 대충 물에 헹구던 그는, 여진의 맥주가 아직 남아있음을 기억하고 용기를 싱크대 옆에 둔다. 다시 여진에게로 돌아서면, 줄곧 거실의 테이블 앞에 앉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그녀와 눈을 마주치게 된다.
“아, 경감님. 잠깐 손 좀.”
“응? 손은 왜요?”
시목은 별말 없이 서랍에서 손톱깎이를 꺼내온다. 시선으로 시목을 쫓던 여진은 시목의 손에 들린 손톱깎이와 휴지 한 장을 보고 제 손톱을 내려다본다. 생각보다 길어있는 것에 살짝 놀라며 제 앞에 다시 앉은 시목에게 손을 내민다.
“언제 이렇게 길었담. 어떻게 알았어요?”
“긁혔으니까요.”
“긁혔다구요? 어디를, ... 아.”
제 손 끝에 집중한 남편의 눈매와 콧대에 눈길을 주던 여진은, 머쓱함을 느끼며 시선을 돌린다. 시목의 눈길이 잠시 자신의 눈을 향했음을 느꼈지만 시선을 마주하지는 않는다. 손이 잡혀있지만 않았다면 머쓱함에 못 이겨 미간을 긁적였을 것이다. 다시금 손 끝의 감각과 함께 따각따각 소리가 들릴 때 여진의 시선이 도로 시목을 향한다.
“그냥 퉁치죠? 검사님도 했으니까.”
“뭘 합니까, 제가.”
“허, 참. 아프다는 거 듣지도 않은 게 누군데?”
별 대답 없이 뻔뻔스럽게 손톱 깎는 데에 집중하는 시목을 밉지 않게 째리는 여진이다. 시선이 향한 김에 여진은 시목의 손을 훑는다. 그리고는 가지런하게 정리되어 있는 손톱이며 잘 뻗은 손가락이며, 참 잘생겼다는 생각을 한다.
“다 됐습니다. 발톱도 깎아드릴까요.”
“어우 무슨! 됐어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그나저나 나도 깎아주려고 했는데, 검사님 참 깔끔도 하시네요.”
“손톱은 어쩔 수 없습니다. 경감님이 아프시면 안 되니까요.”
덤덤하게 말하며 손톱을 모아 휴지에 싸서 버리는 시목을 보던 여진은 헛웃음을 터트린다.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는 여진은, 아마 시목이 어젯밤에 여진의 사건이 마무리 된 것을 알자마자 손톱을 정리했다는 건 까마득히 모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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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목이 머리에 수건을 얹고, 뿌연 수증기와 함께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온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 만화책을 읽던 여진의 시선이 문으로 향하고, 욕실 안의 더운 공기 때문에 살짝 상기된 얼굴의 시목이 눈에 들어오면 여진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으며 만화책을 침대 옆 책상에 덮어둔다.
“이리 와요, 머리 말려 줄게요.”
여진이 덮었던 이불을 제치고 침대에 걸터앉으면, 시목은 드라이기를 들고 여진의 앞으로 가 바닥에 앉는다. 손바닥으로 따뜻한 바람을 확인한 여진은 시목의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얽어가며 머리를 말려준다. 머리카락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바람과 부드러운 손길이 기분 좋게 만들어, 시목은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다. 곧 물기가 사라진 머리에, 드라이기를 내려놓고 슥슥 손빗질을 해 주던 여진은 양손으로 시목의 정수리를 잡고 그의 머리칼에 입을 맞춘다.
“아-. 샴푸 냄새 진짜 좋다.”
“샴푸 냄새만 좋습니까?”
어느새 플러그를 뽑고 드라이기를 정리한 시목이 몸을 일으켜 여진을 끌어안고, 그대로 침대에 눕는다. 자신의 얼굴에 쪽쪽대며 버드키스를 내리는 시목의 머리를 끌어안으면, 여전히 따끈한 머리칼에 여진은 웃음이 난다. 흘러내린 시목의 머리카락이 입을 맞출 때마다 코 끝이며 눈꺼풀, 이마를 스치면, 간지러움을 참지 못한 여진이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시목을 살짝 밀어낸다. 시목은 아쉬움에 혀로 입술을 축이면서도 여진의 손길에 순순히 밀려난다. 여진의 위에 올라타있던 그는, 여진의 목 뒤로 팔을 넣어 팔베개를 해 주고 그녀의 옆에 눕는다. 여진의 숨결이 닿는 거리에서 그녀와 마주보고, 그녀의 얼굴로 시야가 가득 차는 것이 어김없이 만족스럽다. 여진이 팔을 뻗어 흘러내린 시목의 앞머리를 넘겨주면, 시목은 팔베개를 한 오른팔의 손을 들어 헝클어진 여진의 뒷머리를 정리해준다.
“검사님, 보면은요. 검사님은 되게 고양이 같아.”
“또 그러십니다. 근데 정말 하나도 안 닮았다니까요.”
“닮았다는 말이 아니라, 느낌이 그렇다는 거죠.”
“그건 또 뭡니까.”
“그냥 좋은 거라고 받아들여요.”
“좋으십니까.”
“응?”
“좋은 거라면서요. 좋으십니까. 샴푸 냄새 말고, 제가요.”
여진은 그게 무슨 당연한 말이냐는 듯 푸스스 웃는다.
“검사님 가끔 이러는 거, 되게 귀여운 거 알아요?”
“그럼 자주 이래야겠네요.”
“어휴. 일부러 그러지는 말구요.”
어느새 여진의 손은 시목의 얼굴을 감싸고, 엄지손가락은 시목의 볼을 훑고 있다.
“잘- 생겼네. 내 남편.”
“….”
“이 코에 반했잖아, 내가.”
여진이 다리로 시목의 허벅지를 감으며 손 끝으로 시목의 콧대를 훑는다. 여진의 손 끝이 시목의 콧대를 지나 코 끝에서 멈추고, 시목의 코 끝에 닿아있던 여진의 눈길이 슬며시 위를 향해 시목의 시선과 맞물리면 곧이어 둘의 입술이 맞물린다. 더운 숨이 오가고, 정신없이 혀를 얽고 입술을 깨문다. 헐렁한 티셔츠 아래로 허리께에 손길이 느껴지면 여진은 비음 섞인 숨을 내뱉고, 그 손길이 등을 타고 올라가면서 티셔츠가 따라 올라가면 맨살에 닿는 이불을 느낀 여진이 입술을 떼고 고개를 돌린다. 시목의 강렬한 시선을 회피한 여진은, 팔을 뻗어 그의 머리를 끌어안고 제 어깨 부근에 얼굴을 묻게 한다. 부드러운 머리칼을 쓰다듬자 방금 샤워를 한 것을 입증하듯 달큰한 향기가 피어오른다.
“검사님, 오늘도 하면 나 내일 진짜 쓰러져요. 출근 못 해.”
“키스도 안 됩니까?”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웅얼이는 시목 탓에 여진은 또 간지러움을 느낀다. 고개를 들게 해 눈을 마주하면, 방금 전의 강렬한 시선은 그새 어디다 숨긴 건지, 무미건조한 눈빛 너머로 애절함이 읽힌다. 이러는데 고양이라고 안 할 수가 있나. 여진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불만을 담고 있는 시목의 입꼬리에 입을 맞춘다.
“아니-, 그런 게 아니구요. 내 말은,”
“피곤하신 거 압니다. 오늘은 정말 안 할 거예요. 어차피 콘돔도 다 썼습니다.”
“에? 진짜? 아니 그거를, 언제...”
“어제. 남은 거 다 썼습니다.”
“어휴, 어쩐지. 힘들더라니...”
“좋으셨잖습니까.”
못 하는 말이 없다며 여진이 시목의 어깨를 밉지 않게 툭 쳐도, 시목은 그저 여진의 옷을 추슬러 줄 뿐이다. 문득 날이 갈수록 뻔뻔해지는 시목이 귀엽다는 생각을 한 여진은, 곧이어 자신도 참 주책이라는 생각에 고개를 가볍게 젓는다. 어느새 둘의 자세는 아까와 같이 팔베개를 한 모양새다. 여진이 시목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으면, 그에게선 여진의 살결과 같은 향이 묻어난다.
“검사니임,”
“네.”
“계란볶음밥 있잖아요.”
“점심에 먹은 거 말입니까.”
“으응, 네. 그거, 나 막 처음 혼자 살 때... 엄청 먹었었어요.”
“그랬습니까.”
“네. 하기도 간단하고, 재료도 별로 안 들고... 해서. 그때 기억도 잘 안 나는데... 갑자기 생각났네.”
“맛있었습니까.”
“몰라요, 맛은 딱히... 신경 안 썼던 거 같아. 그게, 원래는 계란을 먼저 지져놓고 다른 걸 볶는 거거든요. 근데 아까, 검사님이 그렇게... 해 준 거. 맛있었어요.”
피곤하긴 했는지, 눈을 끔뻑거리는 여진의 말투가 점점 늘어진다. 시목은 느리게 눈꺼풀을 움직이는 여진을 바라보다, 이불을 고쳐 덮어주고 등을 잔잔히 토닥인다.
“그럼 다행이네요. 자주 해 드리겠습니다.”
“으응...”
등을 토닥이는 시목의 손길에 여진은 결국 눈을 감는다. 시목이 이마에 가벼운 입맞춤을 얹으면, 여진은 눈을 감은 채로 팔을 들어 시목을 껴안는다. 시목의 두툼한 몸을 안고 있으면 안정감이 퍼진다. 일정하게 귓가를 울리는 시목의 심장 소리는 여진을 미소 짓게 만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진은 숨을 고르게 내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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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출하다면 단출한 그들만의 결혼식 후에, 여진은 바로 공덕 래미안으로 들어왔다. 여진이 말은 안 해도 그 옥탑방을 아끼고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시목은 신혼집에 대해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지만, 여진은 시목과 결혼을 약속한 직후부터 옥탑방과 이별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시목이 혼자 살던 집에 미리 싸 들고 온 짐을 풀던 날, ‘신혼부부들 다 집 구하는 것 때문에 골머리 썩는다던데, 능력 있는 남편 만나서 좋네!’ 하며 웃던 예비 신부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물론, 결혼을 했다고 해서 시목이 살던 집이 대단한 변화를 보인 건 아니었다. 여전히 그는 공덕 래미안 10층에 살고, 문을 열고 들어가면 가구들이 변함없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냉장고엔 생수통이 채워져있고, 책꽂이엔 딱딱한 전공 서적들이 꽂혀있으며, 군데군데 빈 바닥에는 차마 사무실에 다 정리해두지 못한 서류들이 쌓여있다. 침대도 여전하고, 침대 옆의 책상도 제자리에 있다.
그러나 그의 집이 그들의 집이 된 후로, 공덕 래미안 1002호의 비밀번호는 결혼기념일 날짜로 바뀌었고, 새로 들어온 사람의 짐을 위해 옷장이 하나 더 들어왔다. 생수통만 가득하던 냉장고엔 음료와 과일, 식재료가 채워졌고, 때문에 언제나 말라있던 싱크대는 제 소임을 입증하듯 물기가 보인다. 두꺼운 전공 서적들이 가득하던 책꽂이에는 새 입주자의 취향이 가득 담긴 만화책이 함께하게 되었고, 깔끔한 벽 군데군데에는 익살스러운 손그림이 붙어있다. 퀸사이즈의 침대에는 두 개의 베개가 나란히 있고, 침대 옆의 책상에는 책과 함께 노트와 색연필이 놓여있다.
오래도록 홀로 고여있어 자신이 외로운 줄도 몰랐던 시목은, 혼자 지낸 몇십 년의 세월이 무색하게도 그렇게 여진의 곁에서 길들여졌다. 필요한 게 없다는 막연한 무의식이 모자란 게 없다는 확신으로 바뀌어 갈 때, 시목의 곁에는 여진이 있었다. 그렇게 시목은 여진의 손을 잡고, 제 발로 공허함에서 벗어나 제 몫으로 주어진 행복을 뒤늦게 품에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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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그리고 오늘 아침과 똑같이 새근새근 자고 있는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는 시목의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그리고 시목의 입술은 여진의 눈가로 향하여, 평온하게 감겨있는 여진의 눈꺼풀에 길고 깊게 입을 맞춘다. 눈가에 와 닿는 무언가를 느낀 여진이 잠결에 우응, 하고 투정 부리며 시목의 품에 얼굴을 묻으면 시목은 익숙하게 여진을 고쳐 안는다. 턱을 간질이는 머리칼을 느낀 시목은 그제야 눈을 감으며 하루를 끝낸다. 내일도 오늘과 같은 하루이길 바라며.
* 이마 키스 : 변치 않는 사랑의 맹세 / 눈꺼풀 키스 (감긴 눈 위) : 감사의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