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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융융 @jung_mogijini

“야. 너 나 국수는 언제 먹여줄 거냐?”

 

원철의 말에 시목이 숟가락을 든 채로 잠시 멈추었다. …국수를 드시고 싶으신가. 대략적인 일정을 떠올리던 시목이 답했다.

 

“오늘 저녁은 어려울 것 같고, 내일 가시죠.”

 

“…”

 

돌아오는 답이 없자 시목은 고개를 들었다. 원철의 표정은 원철의 표현에 따르자면 자신이 사고를 쳤을 때 지었던 표정과 매우 유사했다. 시목은 방금 전의 대화를 떠올렸으나, 원철의 표정이 저리 야차처럼 변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내가 국수 먹고 싶어서 너한테 사달라고 하겠냐. 하여튼 황시목이 이거는.”

 

여전히 의미를 알 수가 없다는 표정을 짓는 시목을 숟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원철이 말했다. 청첩장 언제 줄 거냐고. 그 국수. 시목은 수저를 내려놓았다. 잠시 침묵하던 시목이 미간을 만지며 말했다.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시목을 바라보던 원철이 시목을 향해 몸을 조금 기울이고는 물었다. 특임 끝나고 만났으면 좀 꽤 오래 만난 거고. 이제 둘 다 결혼 적령기인데 그런 이야기 안 해봤냐? …네.

 

“결혼하고 싶은 마음은 있고?”

 

그 말에 시목의 눈이 깜빡였다. 내 옆에 사람이라곤 없을 거야. 누군가에게 했던 자신의 말이 떠올랐다. 자신의 미래에 대해 상상해 본 적도 없거니와, 그 미래에 누군가가 함께 하리라는 것은 더더욱 그려본 적이 없다. 그런 시목을 향해 원철이 남은 밥을 삼키며 말했다.

 

“한 번 진지하게 이야기 해봐. 상대방은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는데, 너는 생각 안하고 있으면 그것도 나름대로 문제고, 반대여도 마찬가지니까.”

 

생각에 잠긴 시목의 얼굴을 보며 원철이 밥을 우물거렸다. 이래가지고 연애하는 것도 용하다. 결혼이 종착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제가 아끼는 후배 녀석이 좋은 사람과 부부의 연을 맺는 걸 보고 싶기도 하니까.

 

 

 

 

*

 

 

회사에 들어오고 나서 의외로 재판만큼이나 잦았던 것은 결혼식이었다. 가능하면 참여하지 않고자 했으나, 부득이 가야되는 경우도 있었다. 불편하게만 보이는 옷을 입고, 일면식만 있는 사람들에게 반복해서 인사하고, 자신들을 제외하고 아무도 듣지 않을 주례사를 들으면서도 행복해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는 신랑과 신부. 벽 너머의 무언가를 바라보는 무감각한 눈으로 시목은 바라보았다.

 

영원을 맹세한 그 약속이 깨어지는 경우를 시목은 알고 있었다. 가정에서의 경험과 더불어 사건을 통해 만나는 경험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러한 경험을 없더라도 사랑으로 시작하는 결혼이라는 제도가 제게는 적합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불 꺼진, 아무도 없는 집이 자신에게 당연한 것처럼.

 

그렇게 생각해 본 바 없었기에 여진과의 미래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건가. 시목은 여진과의 시간을 떠올렸다. 만나서 손을 잡고 어깨에 기댄 채 서로의 공간에서 나누었던 시간들은…. 들어봐 검사님, 오늘 서에서 이런 사건이 있었어요. 그렇게 이야기하는 여진의 얼굴의 움직임을 가만히 보다가 이렇게 심각한 이야기에 왜 웃고 있냐는 여진의 핀잔에 제 얼굴을 만져보기도 했고. 주말 아침 햇살 아래 제 품에서 곤히 자다가 깨어 눈이 마주치고, 그 눈에 담긴 웃음과 저를 끌어안는 온기에 마주 안으며 진정한 휴식이 무엇인지 깨닫기도 했고. 저와 크게 다르지도 않을 조직생활에 괴롭히는 사람 있으면 내가 혼내줄게, 하며 허공의 지었던 여진의 주먹에 어쩐지 의지가 되는 제 자신이 우습기도 했고.

 

미래를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여진과 함께하는 그 모든 순간에 시목의 시야에는 여진만이 채워져, 시목은 다른 어떠한 것을 생각할 수가 없었다.

 

막연하게도 여진과 함께 하는 그 시간들이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라 생각했나. 그러나 그 이상의 것. 다른 사람들처럼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는 삶. 그런 미래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상상할 수가 없다. …왜?

 

여진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래, 문제는 저 자신이겠지. 시목은 거울 속에 무표정한 자신을 바라보았다. 내 곁에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당시의 판단은 틀린 것으로 밝혀졌지만, 그럼에도 시목은 그러한 판단을 내린 근거를 잘 알고 있었다. 근본적으로 결여되어 있는 자신과 여진은 평생을 함께 할 수 있을까?

 

지금 이대로 여진의 곁에서 머무르고 싶은 마음에 미래에 대해 계획하지 않은 것은 아닐까. 지금의 관계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는 순간 결국 끝을 향해 걸어가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평생을 함께하기로 서약하는 것이 그저 순간에 그치지 않을까. 법과 정의를 지키기로 약속했던 검사들이 쉬운 길로 가고, 화려한 결혼식장에서 영원을 맹세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한 사람들이 걸어간 길처럼.

 

당신이 바라는 것들을 내가 줄 수 없고, 그런 자신을 바라보며 지쳐가는 당신의 표정을 내가 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 수술이 끝난 후 저를 바라보면 부모님의 표정에 담겨 있던 기대, 실망, 낯섦, 포기, 그리고 무감각함. 그것들을 여진의 얼굴에서 찾게 된다면. 여진의 뒷모습을 보게 된다면. 따뜻한 온기 사라진 집 안에 홀로 들어서게 된다면.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냉기어린 칼날이 제 심장을 저미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한여진]

 

핸드폰 액정에 여진의 이름이 반짝였다. 세 글자 이름만으로 차가웠던 제게 온기가 채워지는 느낌. 미디어에서 표현하는 사랑은 설레고 아름답고 격렬했기에 시목은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그것과 같은지 확신 할 수 없었다.

 

그저 시목은 여진이 필요했다. 자신을 인간답게 만들어준다거나 부족함을 채워주는 도구로서의 필요성 따위가 아니라. 자신을 존재할 수 있게끔 만들어주는 유일한 존재로서. 종교는 믿지 않았지만 이해할 수 있었다. 공허해보이던 우주에 다른 무언가가 있으리라 이야기하는 여진의 목소리에 보이던 별들.

 

눈을 감으면 그려지는 여진의 얼굴. 그 눈동자에 담긴 다정함. 어깨를 다독이는 손길. 어떻게는 내가 구해줄게, 자신을 향해 기울어지며 건네는 응원의 메시지. 아프면 말하라는 그 다정한 목소리.

 

 

 

*

 

 

늦은 밤 옥탑 방에 올라온 시목을 반겨주는 여진의 몸짓에는 잠이 뚝뚝 묻어나왔다. 살짝 한 쪽으로 삐친 머리를 하고 열심히 골랐던 잠옷을 입고 눈을 매만지는 여진에게 시목이 카모마일 차를 건넸다. 뭐야, 잠은 다 깨워놓구. 그렇게 말은 하면서도 여진의 눈이 미소 지었다. 시목은 그런 여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검사님. 무슨 일 있어?”

 

차로 인해 따뜻해진 손이 시목의 차가운 뺨에 닿았다. 그 온기를 향해 고개를 기울인 시목이 처연히 눈을 감았다. 저 멀리 도시의 소음과 불빛을 밀어내듯 부는 바람 가운데서도 여진의 온기가 느껴졌다.

 

“나는 여진씨가 바라는 걸 줄 수 없는 사람일지도 몰라요.”

 

응? 여진이 되물었다. 황당하다는 듯 웃음이 섞인 목소리로 그게 무슨 말이야, 말하다가 시목의 눈을 바라본다. 자신의 얼굴을 살피는 그 눈동자에 담긴 걱정, 애정, 다정함, 믿음. 제게는 너무나 과분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잃고 싶지는 않았다.

 

“여진씨가 바라는 미래에 내가 적합하지 않다면 지금 말해줘요.”

제 뺨에 닿은 여진의 손을 끌어 손바닥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시목이 속삭였다. 그런 시목을 살피던 여진이 고개를 기울였다. 시목이 던지는 말은 종종 수수께끼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나 여진은 언제나 답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내가 검사님. 마음에 안 드네요, 하면 뭐 잠자코 떠날 거야?”

 

그런 표정 지으면서, 그렇게 내게 입 맞추면서? 남은 한 손을 마저 시목의 얼굴에 가져다 대고 두 손으로 시목이 제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도록 한 여진이 단호하게 말했다.

 

“검사님, 아니 황시목. 잘 들어.”

 

도시의 흐린 불빛을 배경으로 여진의 얼굴로 초점이 맞춰진다. 언제나 들리던 도시의 소음이 가라앉고 여진의 목소리가 시목에게로 향했다.

 

“검사님은 내게 무언가를 줄 필요가 없어. 그냥 내 옆에 있기만 해도 충분해요. 그건 검사님도 마찬가지잖아.”

 

언제나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제게 답을 주는 사람. 깊은 곳으로 끌려가도 자신을 구해 줄 단 한 사람. 시목은 제 얼굴에 닿은 여진의 손을 가만히 잡아내려 붙잡았다. 그런 시목의 손을 여진이 마주 잡았다.

 

“내가 바라는 미래는 황시목씨, 당신이랑 함께 하는 거야. 해야만 해서 하는 게 아니라, 당신이랑 함께이기 때문에 그 모든 여정을 해보고 싶은 거야.”

 

여진과 함께할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을 시목이 여진은 사랑스러웠다. 자신에게 적합하지 않으리라 스스로 말하는 시목이 안타까웠고, 그렇게 생각했을 이유를 알고 있어 마음이 아팠다. 제 손 끝에 닿는 시목의 손이 떨리고 있어, 여진이 단단히 잡으며 말했다.

 

“반지도 없고, 나는 심지어 잠옷 차림이고, 근사한 장소도 아니고, 적절한 타이밍도 아닌 거 같은데요, 황시목씨. …나랑 결혼할래?”

 

시목의 눈시울이 약간 붉어지는가 싶더니, 곧 눈을 한번 감고는 시목이 가만 미소 지었다. 뺨 위로 보조개가 드러났다. 여진이 자신을 아는 만큼, 시목은 여진을 알았다. 자신은 답을 알고 그 답을 듣기 위해 여기로 온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주머니 속의 자리한 반지를 설명할 수가 없었다. 다정한 표정으로 눈을 뜬 시목이 말했다.

 

“반지는 제가 준비했고, 여진씨 잠옷은 제가 준 거라 좋습니다. 여기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이고, 타이밍도 적절했습니다. 네, 한여진씨. 결혼해요, 우리.”

 

여진의 손을 잡고 반지를 끼우며 시목이 단정히 대답했다. 입을 버리고 제 손에 자리한 반지를 보던 여진이 상기된 볼을 하고 말했다. 아니, 잠깐만. 내가 계획한 프러포즈는 이것보다 멋졌어. 시목이 대답했다. 지금도 좋지만, 저에게도 더 좋은 계획이 있습니다. 시목의 뻔뻔한 말에 여진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렇기에. 시목과 여진의 결혼 전 청혼은 총 세 번 시행되었다.

 

 

 

*

 

 

 

“시목씨 이제 진짜 마지막이야. 후회하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야.”

 

커다란 샹들리에 불빛 아래 반짝이는 여진이 장난을 담아 속삭였다. 시목이 단호히 받아쳤다.

 

“그런 일도, 그럴 일도 없습니다.”

 

쑥스러울 때 나오곤 하는 가로로 길어지는 여진의 입매를 보며 시목이 미소 지었다. …신랑이 한눈을 파네요. 주례사를 하던 원철의 불만 섞인 목소리에 애써 돌아가는 뺨 위에는 그 동안 이해할 수 없었던 결혼식의 여느 신랑들과 마찬가지로 행복한 미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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