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틀 전, 그리고..
고요 @20l706l0
넓은 거실, 현관 반대편으로는 바깥과 이어지는 또 다른 문이 있다. 그 문을 열면 선베드와 등받이가 없는 작은 의자가 보인다. 그 앞에 원형의 작은 테이블 너머로는 적당한 크기의 개인 풀장이 있다. 여진은 그 풀장보다 옆으로 난 작은 돌길을 지나면 나오는 공용 풀장을 더 좋아했다. 공용 풀장이라지만 아직까지 다른 사람을 만난 적은 없었다. 리조트가 큰 탓에 (아마도) 자신의 숙소 앞에서 노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유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시목은 수영을 좋아하지 않지만, 여진의 손에 이끌려 많은 시간을 풀에서 보내게 되었다. 수영을 좋아하고 꽤 잘하는 여진이 시목의 엄격한 수영선생님 노릇을 했다. 금세 몸을 물에 띄우는 시목에게 “거 참, 욕심이 없는 사람이야.”라는 말을 했다가 “제가요?”하고 대답하는 시목의 뜨겁고 진지한 눈빛에 여진은 와락 그 목을 끌어안고 물속으로 잠겨 들었다.
버기를 타고 리조트로 들어오는 길은 어둡고 한산했다. 멀리 보이는 리조트는 흡사 궁전 같았다. 화려한 불빛과 꽃으로 가득한 넓은 로비의 모습에 여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리조트 안으로 들어오며 받은 웰컴 플라워를 손에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시목의 손을 잡았다. 체크인을 하며 짧지만 능숙해 보이는 시목의 영어 실력에 여진이 우와, 라고 놀라는 것을 보고는 프런트 직원이 so cute. 라고 말하며 웃었다.
늦은 밤에 공항에 도착해 그랩을 타고 들어와 다시 버기로 갈아타고, 그것에서 내린 후에는 이미 다른 세상에 들어온 후였다. 바깥은 어떤 세상인지 아직 알 수가 없다. 도착 후부터는 내내 방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이 넓은 리조트 안에서만 지내고 있었다. 무료로 제공된 챙이 큰 모자를 얼굴에 덮고 선베드에 누워 무료하게 시간을 보냈다. 리조트와 이어지는 해변이 있다고는 들었지만, 아직 밖으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그러면서도 머리를 맞대고 앉아 진지하게 인사말 공부를 시작했다.
“따라해 봐요. 안녕하세요가 슬라맛 빠기.”
“슬라맛 빠기.”
“감사합니다는 뜨리마 까시.”
“뜨리마 까시.”
그런 시목을 흡족하게 바라보는 여진에게 시목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한 번 더 말했다.
“뜨리마 까시.”
리조트 생활은 무료하고 단조로웠다. 당사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표면적으로 항상 일에 치여 사는 여진과 시목에게 한 번쯤은 있어야 할법한 시간들이었다. 느지막이 잠에서 깬 시목이 팔을 뻗어 비어있는 침대를 쓸어보고는 몸을 일으켰다. 커튼이 열린 창밖으로 선베드에 기대어 있는 여진의 뒷모습이 보였다. 다시 침대에 누운 시목이 이제는 간신히 정수리만 보이는 여진을 바라본다. 가끔 가늘고 흰 팔이 선베드 밖으로 나왔다가 사라졌다.
조식은 에그 베네딕트와 오믈렛을 주문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붉은색의 음료를 시목의 앞으로 밀어놓은 여진이 시목의 오믈렛을 조금 잘라다가 자신의 접시에 놓는다. 그런 여진을 힐끗 쳐다본 시목이 여진의 에그 베네딕트에 올라가 있던 수란을 포크로 푹, 하고 찔렀다.
“나쁜 사람.”
여진이 조용히 속삭였다.
조식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리조트를 조금 둘러보았다. 화려한 건물 내부를 제외하고는 전부 식물이 가득한, 숲을 연상시키는 좁은 길들이 거미줄처럼 이어져 있다. 자칫 길을 잃을 수도 있겠다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판석으로 이어진 그 길들은 너무도 푸르고 평화로워 보여서 앞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발을 맞춰 걷다가 지나가는 버기를 만났다. 손을 흔들어주는 운전기사와 마주 인사를 하다가 그 뒤에 앉은 신혼부부를 본 여진이 티셔츠 한 장만 단출하게 걸친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본다.
“우리도 밖으로 나가봐요.”
“그러죠."
시목이 여진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답했다.
해변 역시 한가로웠다. 사람들은 다 어디에서 휴식을 즐기고 있는지 궁금했다. 커다란 방석을 연상시키는 컬러베드가 모랫바닥 위에 드문드문 놓여 있었다. 몸을 누이고 있으면 위로는 끝없이 펼쳐진 하늘, 아래로는 끝없이 펼쳐진 바다 사이에서 잠들 수 있는 꿈같은 곳이란 생각이 들었다. 비현실적인 그런 풍경들이 이곳에서는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여진과 시목은 맨발로 모래의 감촉을 느끼며 해변을 걸었다. 바람이 강하게 불어 머리카락을 흩뜨렸다. 마지막 날에 이 해변에서 식사를 하는 코스가 있다. 그것을 생각하자 벌써부터 아쉬워지는 마음에 여진이 이만 돌아가자며 시목의 손을 잡아끌었다. 해변은 잠깐 둘러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다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배가 채 꺼지지 않았는데 점심시간이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소화 좀 시켜요.”
여진이 몸을 한 바퀴 뒹굴, 굴려서 시목의 얼굴 가까이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은근하게 말했다. 고개를 살짝 돌린 시목이 그런 여진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래야겠네요."
그리고는 휘적휘적 풀로 걸어 나간다. 여진은 그 뒷모습을 보고는 자전거 바퀴를 굴리듯 허공에 발길질을 몇 번 하다가 평온한 표정으로 일어서 시목을 따라나섰다.
여진과 시목이 처음으로 섹스를 한건 시목이 여진의 옥탑방에 처음 왔을 때였다. 처음, 이라고 하니 작정하고 날을 잡은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결코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다 함께 모인 회식자리에서 여진이 깨달은 것뿐이었다.
“탕웨이 닮은 분? 그 시목이랑 그렇고 그런.”
순간 여진은 그 말이 마치 방아쇠 같다고 생각했다. 그 방아쇠가 무엇을 당겼는지 그때의 자신은 아직 알지 못했다.
시목과의 섹스는 좋았다. 본능적인 행위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설명해주는 좋은 예시다. 시목이 다정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란 걸 여진은 그와의 섹스에서 알게 되었다. 설명할 방법은 없다. 분명한건 그의 허벅지는 탄탄하고 엉덩이로 흘러 오르는 그 곡선이 너무 섹시하다는 것이다. 이 정도면 다정한 사람이 아닐까. 아니라도 무슨 상관인가.
“검사님, 나는 검사님이 왜 이렇게 좋을까요.”
침대 구경할래요? 아니 오늘 좀 섹시. 아니, 나랑 잘래요? 이런 말들에도 놀라는 것 같지 않았던 눈동자가 고백 축에도 못 끼는 그 말에 당황한 듯 흔들렸었다.
“아, 그렇구나.”
여진이 엎드렸던 상태에서 시목이 있는 방향으로 돌아누우며 손뼉을 쳤다. 굽혀진 팔 사이로 훤히 드러난 가슴을 보고 시목이 이불을 끌어다가 덮어주었다.
“검사님이 나를 좋아하구나.”
“제가요?”
“그러니까 나랑 잠도 자고, 이렇게, 이렇게.”
이불을 다시 들친 여진이 꾸물꾸물 움직여 맨 가슴을 시목의 가슴과 맞닿도록 껴안았다.
“심장이 뛰잖아요.”
“심장은 원래 뛰는데요.”
따뜻한 손이 허리를 감싸 안는다.
“과도하게 빨리 뛴다고요.”
“똑똑하네요.”
시목의 손을 붙잡아 자신으로 가슴으로 가져다가 댄 여진이 물었다.
“빨리 뛰나요?”
나답지 않았던 걸까? 사실, 그 어떤 사람에게도 나다운 것은 없을지도 모른다. 또한, 나에게 백 가지의 모습이 있다면 그 백 가지의 모습이 전부 나다움일지도 모른다. 운명 같은 걸 믿고 믿지 않고도 중요하지 않다. 나는 그 순간, 단지 눈앞의 사람을 보았을 뿐이다. 그러니까 이 모든 상황은 우연이자 운명이자 사랑이자 일탈일 것이다.
여진이 일기인 듯 아닌듯한 그 글을 읽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명문이군. 휘릭, 몇 장을 더 넘기자 시목이 인정하지 않을 것 같은, (하지만 명백히) 그의 얼굴을 그린 그림이 있다. 이건 이따가 보여주기로 하자. 다음 장을 넘겨 공백에 오늘 날짜를 적었다.
시목은 필시 거실 바깥쪽의 테라스에 있는 선베드에 누워있을 거란 생각을 했다. 여진은 낮은 듯 적당한 듯한 높이의 공용 풀장을 천천히 걸었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물속으로 잠겨 든다. 머리를 넣고 부드럽게 팔과 다리를 휘저어 앞으로 나아갔다. 고요하고 평온한 물속을. 몸을 잠자리에 누이듯 뒤집어 동동 떠올랐다가 다시 잠영하기를 반복했다. 한참을 나아갔기에 다시 돌아가기 위해 물속에서 방향을 틀었을 때, 앞에 무언가 아른아른한 것이 보였다. 언뜻 불빛 같아 보이는 그것이 뭔가 싶어서 몸을 일으켜 물 밖으로 머리를 내밀어봤지만, 그 방향으로는 나무와 풀들뿐이다.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 아까 그곳으로 짐작되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보이지 않는다. 여진은 자신이 머물고 있는 리조트 쪽을 가늠하여 다시 부드럽게 수영을 했다. 힘을 주지 않고 몸을 물에 맡기듯이 흐르듯이 잠영을 했다. 그때 이번에는 뒤쪽에서 무언가가 느껴져 허리를 구부려 부드럽게 방향을 바꾸며 돌아보았다. 불빛. 아까의 그 불빛이다. 물속에 어떤 생명체라도 사는 걸까. 호기심이 생긴 여진이 눈을 떼지 않고 불빛을 향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왠지 물속이 따뜻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열기가 느껴졌다. 화들짝 놀란 여진이 물속에서 나오며 동시에 일어섰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리조트. 나무와 수풀이 보인다. 멀리서 시목이 자신에게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날 밤, 꿈을 꿨다. 리조트에서 잠들기 전의 시간은 행복 그 자체였다. 시원하고 쾌적한 공기, 사각사각한 침구, 부드럽게 자신을 안아주는 몸. 작게 흐르는 물소리 같은 것들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었다. 그 어느 곳에서도 이보다 더 행복할 순 없을 것 같은 잠자리에서는 꿈도 꾸지 않고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여진은 꿈을 꿨다.
어딘가에 홀로 남아 그를 찾고 있는 꿈을. 발밑에서 무언가가 계속 자신을 끌어당기고 있는데 끌려가지 않으려고 버티며 하염없이 그를 찾는 꿈을. 결국, 저 깊은 아래로 끌려들어가며 엉엉 울고야 마는, 그런 꿈을 꾸었다.
잠에서 깼을 때 눈가가 젖어있었다. 고개를 돌리니 창밖으로 보이는 평온한 광경들이 오히려 현실 같지 않았다. 곧 소용돌이 같은 암흑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아 두려웠다. 손을 조심스레 뻗는데, 그 손을 다른 손이 맞잡았다.
“깼네요.”
침대가 가볍게 일렁이는 것이 느껴졌다. 무릎걸음으로 가까이 다가온 시목이 여진의 젖은 눈을 걱정스러운 듯 바라보았다.
“꿈꿨나...”
나지막이 달래주는 듯한 그 말투에 여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시목의 손을 끌어다가 손등에 눈물을 닦듯 젖은 눈을 문질렀다.
+
소원. 이라는 글자가 적힌 일기장 한 페이지. 구석에 의미 없는 물결무늬를 그리고 있던 여진이 여러 줄이 겹쳐진 그 무늬 맨 아래에 잃어버리지 않는 것. 이라는 글을 적었다. 그러다 그 글자 위에 줄을 그어 지우고는 이렇게 다시 적었다. 헤어지지 않는 것.
“가죠.”
시목이 여진의 검은 에코백을 집어 들며 말했다. 오늘은 밖에 나가기로 한 날이다. 떠나기 전 예약해둔 일일투어 일정이었다. 우기라고 들었는데 다행히 나올 때는 흐리기만 할 뿐 비가 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우붓으로 향하는 도중 빗방울이 한 방울씩 떨어졌다. 바깥 풍경을 카메라에 담고 있던 여진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비 맞아도 괜찮죠?”
시목이 고개를 끄덕였다.
왕궁에 들어가기 전 반바지를 입은 여진이 샤롱(치마처럼 허리에 두르는 전통의상)을 대여해 허리에 두르고 주황색 천은 시목의 허리에 매어 주었다. 왕궁은 작고 공사를 하는 곳이 많았지만, 고풍스러운 느낌이 났다. 여진과 시목은 그 이색적인 풍경을 천천히 눈에 담았다.
“자기, 여기 보세요~”
여진이 장난스레 시목을 부르자 시목이 약간 뻣뻣해진 표정으로 여진을 보았다.
찰칵. 소리와 함께 그 얼굴이 카메라에 담겼다. 액정으로 그것을 확인한 여진이 깔깔대며 웃자 시목이 슬그머니 발걸음을 옮긴다. 그 뒤를 쫓아가 팔짱을 끼며 걷는 여진과 시목의 뒤로 그림자가 다정하게 얽혀있었다.
흐린 듯 맑은 날씨가 이어졌다. 그 아슬아슬한 날씨의 습함을 견디며 둘은 시장 구경을 나섰다. 시장은 색감이 화려한 옷들로 가득했다. 눈을 어디에 둘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한 여진의 곁에서 시목은 그런 여진의 팔을 잡고 묵묵히 앞만 보며 걸었다.
“와, 이거 봐요!”
여진이 가리킨 것은 남자 성기모양을 한 병따개였다. 보아하니 시장 곳곳에는 다양한 색깔과 크기의 성기모양 기념품들이 바나나 송이처럼 걸려있었다.
“무슨 미신 같은 게 있나...우와 되게 크다!”
하며 달려가는 여진의 어깨를, 평소답지 않게 다급히 붙잡은 시목이 성큼성큼 걸어 시장을 벗어났고 여진은 그런 시목의 붉어진 귀를, 뒤통수를 카메라에 담았다.
돌아가는 길에는 비가 폭우처럼 내렸다. 반쯤 물에 잠긴 자동차 바퀴가 거센 물보라를 만들며 앞으로 나아갔다. 절정에 오른 습한 기운들이 전부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젖은 가방을 털고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내는 것이 좋게만 느껴졌다. 아니, 그것조차 좋았다. 모든 것이.
시목은 한산한 리조트 안을 걸었다. 한편에 웨딩홀까지 갖춰져 있는 리조트는 하염없이 걸어도 끝이 없을 것 같았다. 머물고 있는 공간 밖으로 나가 공용풀장을 따라 난 길을 걸으며 수면에 둥둥 떠 있던 여진의 모습을 떠올린다. 설핏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둥둥 떠 있는 모습이라니. 손가락 하나에도 뒤집힐 것 같은, 수수깡으로 만들어진 배 같지 않은가.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자신과 여진이 꼭 그 수수깡 배 위에 올라탄 사람들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언제 뒤집힐지 모른다는 불안함의 기저에는 무엇이 있는가. 여진의 손을 꼭 잡고 여기까지 오며 시목은 문득문득 밀려왔던 그 불안감을 자의로 떠올려 보았다. 처음에는 단순히 자신의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떠나오기 전 이곳의 화산이 폭발하여 여행이 미뤄지거나 취소될 뻔한 일 말고는 이번 여행과 관련해서 마음에 걸리는 일은 없다. 뭘까. 언뜻 보면 잔잔한 물결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일렁임이 확연히 보인다. 정체 모를 불안감을 들여다볼수록 그 파동이 커지는 것 같은 느낌에 시목은 결국 생각을 접었다. 여진의 젖은 눈이 떠올랐지만, 그것 역시 가볍게 고개를 저어 넘겼다. 악몽은 꿈에서 깨면 그만이다.
밖으로 나간 다음 날은 리조트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었다. 그런 식의 징검다리 투어 중 두 번째 투어 날이 밝았다. 맑고 무척 더운 날이다.
"여기 날씨는 시목씨 같네요."
"어떤 점이요."
"적당히 라는 게 없달까..."
동의하진 않지만, 시목은 그 비유가 재미있다는 생각을 했다.
여진과 시목은 절벽 위에 있다는 사원으로 갔다. 절벽 위라는 것에서 득도를 향한 의지의 한계가 느껴졌다. 하지만 사원은 집 근처 어딘가에 있는 공원처럼 여유롭고 한가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제멋대로 돌아다니는 원숭이를 보여 시목은 어떠한 것의 끝은 다른 것의 끝과 맞닿아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여진은 황망한 표정으로 나무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시장에서 산 파란색 모자가 열매처럼 나무에 걸려 있었다. 그리고 곧 움직였다.
“무슨 일 있습니까.”
잠시 옆을 둘러보고 온 시목이 여진에게 물었다. 여진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올려다보자 파란 모자를 든 원숭이가 나뭇가지 사이를 넘나드는 것이 보인다. 내 모자. 여진은 반쯤 울상이 된 얼굴로 시목을 돌아보았는데, 시목은 약간 미소를 띤 채 원숭이의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여진이 토라진 표정으로 앞서 걸었다.
푸른빛의 셔츠가 바닷바람에, 말 그대로 펄럭이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수평선과 시목의 어깨가 나란해져 시목은 바다와 하나인 것처럼 보였다. 여진이 그 손을 잡아 자신 쪽으로 당겼다. 허리에 팔을 두르자 후끈한 체온의 열기가 전해졌다. 바람에서 소금의 향과 맛이 느껴졌다. 멀리서 패러글라이딩을 하는 사람들이 하늘에 잠겨있다.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오랫동안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돌아오는 길에 패키지에 포함된 외부 식당에 들러 늦은 점심을 먹기로 했다. 나시고랭. 나시고랭. 여진이 나시고랭을 입에 넣으며 중얼거렸다. 왜 이름이 나시고랭이지 하며. 시목은 그 모습을 웃으면서 보다가 한여진은 왜 한여진일까요. 하고 물었다. 여진이 아하? 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고 둘은 마주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그녀가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
음란한 것에도 냄새가 있다면 딱 이런 것일 거라고 여진은 생각했다. 팔을 들어 코를 가져다 대자 거기서도 묘한 냄새가 났다.
"닦아줄까요."
머리를 털며 시목이 물었다. 어떻게? 여진의 말에 시목이 머리를 털던 수건을 들어 보이며 이거 적셔서. 하고 답했다. 이것이야말로 신혼 때만 발휘되는 희생적 서비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것을 받을까 생각하던 여진이 결국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일어섰다.
여진과 시목은 나른해진 몸을 이끌고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나섰다. 버기를 타고 듬성듬성 불이 켜진 리조트 길을 따라 식당으로 이동했다. 걸어서 오갔던 길이지만 버기를 요청한건 여진이 장난스레 다리에 힘이 없네~ 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시목이 작게 헛기침을 하며 전화를 마치고 버기가 올 동안 여진의 곁으로 와 앉았다. 그리고는 여진의 허벅지를 손으로 부드럽게 주물러 주며 말했다.
"역시 서서는 좀 무리였나요."
그 말을 들은 여진이 자신도 모르게 시목의 손등을 찰싹 때렸다.
식당에 들어선 여진과 시목이 어제와 같은 테이블에 앉은 후 메뉴판을 펼쳤다. 꽤 맛있었는지 여진이 이번에도 나시고랭을 선택했다. 김밥처럼 생긴 롤을 앞에 둔 시목이 미소를 지은 채 그런 여진을 바라보았다.
“왜요?”
“아니...”
시목이 나시고랭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항상 같은 것만 먹는다고 투덜댔잖아요.”
“...내가요?”
“국밥 질린다면서요.”
잠시 생각에 잠겼던 여진이 단호하게 말했다.
“나시고랭은 달라요.”
+
여행의 설렘도 있었지만 이 시간들은 여진과 시목에게 휴식의 의미로 더 크게 다가왔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들. 하늘을 바라보거나 가만히 앉아있거나 하는 것들. 그 고요한 시간의 끝이 다가오는 것을 느낄 때마다 여진은 마치 수명이 다한 형광등 아래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 여행이 끝남과 동시에 전원이 툭, 하고 나가버릴 것 같은 예감. 그 뒤로는 끝없는 어둠이 있을 것 같은 불길함. 파란 바닥의 색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는 풀장의 물은 바다의 색과 같다. 하늘거리는 긴 소매 상의에 반바지를 입은 시목이 천천히 풀장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그런 시목을 잡고 싶었다. 잠깐, 이라고 소리치려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순간 당황한 여진이 목을 움켜쥐었을 때 시목은 물에 반쯤 잠긴 채였다. 그가 돌아본다. 손을 뻗는다. 빛이 반사된 시계가 반짝거렸다.
여진은 엎드린 채였다. 펼쳐진 일기장에는 잃어버린 모자가 그려져 있다. 언제 잠들었지. 곰곰이 생각해본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생활은 마음을 느슨하게 만들었다. 조식을 먹고 이른 시간부터 물놀이를 했던 것이 생각났다. 기지개를 켜고 덮여버린 일기장을 다시 앞으로 끌어왔다. 출발 전에 느꼈던 설렘과 걱정, 불안했던 마음이 두서없이 적혀있는 페이지를 넘기자 소원. 이라고 적힌 페이지가 나왔다. 다시 한 장을 넘기니 그리다 만 모자 사진이 나온다. 기억. 이라는 글자가 적힌 페이지였다. 아, 맞아. 이 단어를 보고 모자를 그리고 있었지. 마저 그림을 완성한 여진이 한 장을 넘겨본다. 새로운 장에 적힌 단어를 유심히 보다가 뭔가를 끼적이고 있는데, 밖으로 나갔던 시목이 돌아왔는지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기척이 났다.
혼자 느릿느릿한 걸음걸이로 여기저기 잘 돌아다니는 시목이 귀엽게 느껴졌다. 일기장을 덮고 옆으로 돌아누워 방으로 들어오는 시목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여진이 아직 잔다고 생각하는지 시목은 왔다는 인사 없이 조심스레 움직였다. 여기저기 벗어둔 옷가지들을 주어 캐리어에 넣는다. 그리고는 캐리어 깊숙한 곳에서 책을 꺼내 그것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아마 밖에서 읽을 모양이다. 그런데, 뭐라고? 책? 여진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멍하게 창밖을 바라보았다.
“싫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둘 다 쇼핑에 관심은 없었지만, 함께하기 때문인지 꽤나 즐겁게 느껴졌다. 알록달록한 상점들이 즐비하고 그 상점마다 사람들이 가득했다. 지인들에게 줄 선물을 함께 고르며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자신들과 비슷한 처지인 것 같아 웃음이 나왔다. 뭘 줘야 할까. 즐거운 고민이었다.
“가방 하나 사죠.”
“가방이요?”
“여진씨 옆으로 매는 가방이요.”
시목이 말했다. 여진이 눈동자를 도로록 굴리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시목의 팔짱을 꼈다.
쇼핑을 마친 후에는 낡고 저렴한 마사지 숍에 들러 마사지를 받았다. 자의로 간 것은 아니었고 투어 상품의 일부였다. 뺄 수도 있었지만 그냥 받기로 했다. 그 결과 숍에서 입었던 약간 촌스러운 옷이 마사지보다 더욱 강렬하게 기억에 남았다. 여진은 시목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지 못한 것에 계속 아쉬워했고 시목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느지막이 리조트로 돌아와서는 짐을 내려놓고 곧바로 다시 나갈 채비를 했다. 여진은 어깨를 드러낸, 발목까지 오는 긴 원피스를 입었다. 그 옷의 무늬가 마사지 숍에서 입은 옷의 꽃무늬와 비슷한 것 같은데 느낌은 확실히 달랐다. 시목이 옷을 유심히 바라보자 여진이 빙그르 돌며 이쁘죠? 하고 물었다. 시목은 고개를 끄덕였다.
해질녘 해변의 레스토랑은 주홍빛으로 물들어 있다. 신혼여행에 꼭 있어야 할 법한 풍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슬프도록 아름답고 낭만적인. 스테이크 요리 접시와 와인 잔을 예쁘게 세팅한 여진이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아, 좋다.”
“그러네요.”
시목이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답했다.
“아름다운 것들에게는 왜 슬픈 기분이 들까요.”
“슬퍼요?”
“조금.”
여진의 얼굴에 정의할 수 없는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것을 본 시목이 여진의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아본다. 해가 수면에 반쯤 걸쳐져 있다.
“...다시 오지 않으니까?”
해는 순식간에 바다로 녹아들었다.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뜬다지만.”
“그건 내일의 해니까요.”
여진과 시목은 잔을 들어 건배를 했다. 입에는 달콤한 와인이 눈에는 서로를 향한 꿀 같은 미소가 깃들어 있었다. 시목이 바람에 살살 날리는 여진의 머리칼을 손으로 넘겨주다가 그대로 얼굴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선셋과 잘 어울리는 풍경이었다.
배불리 먹고 마신 뒤의 뿌듯한 기분을 만끽하며 여진과 시목은 손을 잡고 나란히 걸었다.
“처음에 걱정했는데, 그쵸.”
화산이 폭발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를 떠올리며 여진이 말했다.
“그러게요.”
시목이 동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새벽부터 일어나 걱정을 하며 하루 이틀만이라도 미뤄지면 마음이 좀 편할 텐데, 했더랬다.
“운이 좋다니까.”
여진이 한 손을 높이 들자 시목이 자연스레 손바닥을 마주 쳤다. 짝, 하고 손바닥이 부딪히는 소리가 어둠속에서 마치 불꽃이 튀는 것처럼 울렸다. 그것은 흡사, 하나의 막이 끝난 뒤에 울리는 슬레이트 소리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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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부지런히 움직인 여진은 방전상태였다. 체크아웃을 하기 전, 흘러가는 시간이 아깝다며 수영이라도 열심히 할 거야. 라고 말했던 것의 결과였다. 그런 여진의 몫까지 짐을 싸고 꼼꼼하게 확인까지 마친 시목이 캐리어를 현관문 앞으로 모아 두었다.
“좀 더 해야 하는데.”
여진이 아쉬운 듯 풀장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충분히 한 것 같은데요.”
“아쉬워.”
그 말에는 동감한 듯 시목도 고개를 끄덕이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비가 내리고 있었고, 그 비 때문에 물을 잔뜩 머금은 초록 잎들의 색이 유난히 짙게 느껴졌다.
멀어지는 리조트를 여진이 다시금 아쉬운 표정으로 돌아본다.
“꿈같아요.”
여진의 말에 시목이,
“저는 이게 더 꿈같은데요.”
하며 손을 잡았다.
세차게 내리는 비에 리조트의 모습은 금세 사라졌다. 저 너머에, 있다. 있나? 여진이 다시 돌아보았다. 자신의 손을 잡은 따뜻한 체온만이 현실 같았다.
비행기 연착소식에 여진은 왠지 안심이 되었다. 손을 꼭 잡는 여진이 걱정한다고 느꼈는지 시목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준다. 다시 의자에 앉아 서로에게 기댄 여진과 시목이 창 너머로 비행기가 서로 교차하며 움직이는 것을 지켜보았다. 타고 싶지 않다. 여진이 무심코 생각하다가 흠칫 놀랐다.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런데 왜 이런 생각이 드는 걸까. 곰곰이 생각해봐도 마땅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는다. 굳이 말로 표현하자면 불길한, 싫은 느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안 좋은 꿈을 꾼 날 집을 나서는 가족에게 오늘은 조심해라. 라고 말할 때의 걱정스러운 기분 같은 것.
한동안은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야 했기에 둘은 카페에 들어가 차를 한잔 더 마시기로 했다. 냉방이 잘 되는 곳에서 따뜻한 차를 마시며 이곳에서의 마지막 기억을 평온한 것으로 남기고 싶었다.
“자기는 차를 별로 안 좋아하나봐.”
“좋고 싫고가 없습니다.”
여진이 재밌어하며 입에 붙인 자기라는 호칭에 시목도 이제는 익숙해진 모양이다. 여진은 차를 시목은 커피를 앞에 두고 몰려오는 여행을 피로를 꾹꾹 누르고 있을 즈음, 여진이 조심스레 말했다.
"...비행기 타기 싫다."
그 말에 시목이 웃었다.
"일하러 가야죠."
"아니, 그거 말고. 그냥...예감이 좋지 않아서..."
"예감이요?"
"응, 불길해요. 우리 다음 꺼 탈까요?"
시목이 진지한 표정으로 여진을 바라본다.
"잠깐 있어요. 확인해보고 올 테니까."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놀란 여진이 그런 시목의 팔을 붙잡고.
"어, 진짜 바꾸게요?"
"...하루 더 있을까 하고요."
"아니에요. 그냥..."
여진은 말을 잇지 못하고 그냥 웃어버린다. 예감이 현실을 이기기는 쉽지 않다.
결국, 정해진 일정을 따르기로 한 여진과 시목의 비행기 탑승이 시작되었다. 두 좌석의 자리로 배정되어 여진이 창가 쪽으로 앉았다. 캐리어를 상단에 올린 시목이 옆자리에 앉자 그의 허리에 바로 벨트부터 채우는 여진이다. 잠시 대기한 후에, 곧 이륙할 거란 안내방송이 나왔다. 여진은 비행기가 이륙하는 소리가 꼭 천둥소리 같다고 생각했다.
“비행기 흔들리면 무섭던데.”
시목이 그렇게 말하는 여진의 손을 잡아준다. 힘을 준, 하얗게 변한 손끝에 점점 붉은 기운이 돌아올 때까지 시목은 여진의 손을 놓지 않았다. 여진은 그것에 긴장이 풀리는지 잠이 몰려오고 있었다.
“푹 자고 일어나면 도착해 있을 겁니다."
시목이 말했다. 여진 역시 그럴 것이라 생각해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해요.”
잠들기 직전, 여진이 속삭였다. 시목이 대답을 했는지, 애초에 그 말을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환상. 그랬지. 여진이 기억을 떠올려본다. 뭐라고 적었더라. 고민하며 얼굴을 살짝 움직이자 그게 맞춰 기댄 어깨가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편안했다.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는 그 묘한 경계에 서서 여진은 일기장을 천천히 넘겼다.
‘꿈.’
그래, 꿈이라고 적었지. 환상은 꿈이라고.
그러니, 모든 것이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적었었지.
+
눈을 떴다. 눈앞에 끝없이 펼쳐진 바다. 눈을 뜨자마자 코앞에서 찰랑거리는 망망대해의 물을 마주했을 때의 절망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여진이 본능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없다, 없어. 제 손으로 잡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자신은 어떤 상태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불덩어리들이 연꽃처럼 수면에 떠 있는 것이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믿을 수 없는 현실은 여진을 용감하게 만들었다. 드문드문 떠 있는 부유물들을 붙잡고 몸을 이동시켰다. 그러다가 문득, 그것이 떠올랐다. 자신이 바랐던 것. 절실하게 원했던 것들이.
여진은 망설이지 않고 물속으로 잠겨들었다. 잠시 기다렸다가 감았던 눈을 떠 주위를 살폈다. 불덩이가 있는 곳은 수면 아래까지 따뜻한 기운이 번져있었다. 바다 수영에 자신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극단적인 상황 때문인지 그럭저럭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주위를 둘러보는데 저 멀리서 손이, 익숙한 시계를 차고 있는 손이 보였다. 시계가 빛을 받았는지 위치를 알리듯 반짝였다. 마음처럼 재빨리 다가갈 수 없었던 여진이 땅에서 발을 동동 구르듯 발을 저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손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챘고 더 가까이 다가가 손을 붙잡아 당겼을 때. 그 무심한 표정을 한 사람이 품 안으로 끌려들어 왔을 때에는 마치, 자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물속에서 너무도 평온한 모습으로. 슬픔인지 기쁨인지 모를 감정에 눈가가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 얼굴을 꼭 끌어안고 여진이 속삭이듯 말했다.
“감사합니다.”
이마에 입을 맞추고 그의 팔을 당겨서 자신의 등 뒤로 둘렀다. 이번에는 가슴에 귀를 가져다 댄 채 꼭 끌어안았다.
고요한 평온이 이어졌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