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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보이는 순간

처음부터, 여진이 그를 사랑스럽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라면 반대였었지. 여진은 턱을 괴고 멍하니 생각한다. 언제부터일까, 저 눈을 쓰다듬고 싶기 시작한 건. 묵묵히 앞에 놓인 국밥을 먹는 데 열중하던 시목이 저를 쳐다보는 시선에 고개를 든다. 여진의 얼굴을 보았다가 아직 모락모락 김이 나는 그릇에 눈길을 주고는 다시 여진을 바라본다.

 

“입맛이 없으십니까?”

“아니, 그냥. 검사님 얼굴 보는 게 좋아서.”

“매일 보시잖아요.”

“내 남편 얼굴 내가 좀 보겠다는데 뭐. 근데 검사님. 암만 생각해봐도 결혼기념일에 국밥집은 좀 아니지 않나?”

 

말을 마친 여진이 미소 짓는다. 이 무드 없는 부부가 평생 함께할 것을 약속한 지 딱 365일이 지난 날이다.

 

둘의 결혼 소식은 세간의 이슈였다. 세상에 그 목석같던 황시목이, 일과 결혼한 것 같던 한여진과 결혼을 한다니. 그들을 주위에서 지켜본 이들은 기쁨 반 놀람 반의 소리를 질러야 했다. 둘의 관계가 여진의 일방적인 희생이 완성시킨 것이라며 수군대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여진을 모르고 하는 말이었다. 세상 그 누구에게나 그러하듯, 언제나 당당해 보이는 여진에게도 세상은 버거운 존재였다. 믿고 싶지 않은 범죄 행각을 마주해야 하는 현실에 흔들려 그녀의 세상이 무너지려 할 때마다 기둥이 되어주는 건 시목이었다. 그 특유의 담담함이 오히려 든든하게 느껴질 수도 있었더랬다.

 

그렇게 둘의 연애가 시작된 지 이 년이 되던 해에, 소박하지만 따뜻한 결혼식이 열렸다. 부부가 된 이후에 여진과 시목의 삶은 예전과 크게 다른 게 없었다. 이전에도 서로의 집을 오가며 생활해서인지 둘은 금세 신혼 생활에 적응했다. 그럼에도 달라진 게 있다면, 서울 최고의 야경을 자랑하던 여진의 집이 이제 없다는 것과 시목의 집에 만화책 전용 책장이 자리했다는 것, 그리고 시목이 전보다 더 자주, 더 활짝 웃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둘이 결혼한 지 일 년이 다 되어 가는 어느 날, 용산서가 발칵 뒤집어졌다. 여진이 유난히 마음 쓰던 사건이었다. 범인은 쉽게 잡히지 않았고 상황은 나날이 처참해졌다. 누구보다 애타는 심정이었지만 애써 불안감을 묻어둔 채 여진은 일에 집중하자 마음먹었다. 아마 집에 들어가지 못할 터였다.

 

[나 오늘 못 들어갈 것 같아요. 기다리지 말고 자요]

[많이 바쁘십니까?]

[좀. 검사님은 아직 일하는 중?]

[네. 식사 거르지 마시고 꼬박꼬박 챙겨 드세요. 조심하시구요]

 

퇴근을 준비하던 시목은 짐을 풀고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집에 갈 이유가 사라졌으니 다시 일을 해야겠다 마음먹었다. 요 며칠 풀리지 않는 사건 때문에 신경 쓰던 여진이 떠올랐다. 잘 해낼 사람인 걸 알면서도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차라리 내게 맡겨진 일이었더라면 좋았으리라는 부질없는 생각에 잠겼던 시목은 정신을 차리고 다시 서류를 펼쳤다.

 

여진이 집에 돌아오지 못한 채 3일이 지났고 시목은 홀로 집을 지켜야 했다. 결혼 전엔 쭉 혼자 지내던 집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크고 쓸쓸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이 감정은 외로움이리라. 여진에게서 감정을 배운다는 것은 시목에게 퍽 소중한 경험이지만, 이런 류의 감정을 알게 되는 건 원치 않았던 일이었다. 그는 책장에서 여진이 가장 좋아하는 만화책을 꺼내 들었다. 틈날 때마다 자주 읽는 것임에도 읽을 때마다 매번 처음 읽는 것처럼 좋아하던 여진을 생각하니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보고 싶다.‘

 

그리움. 명백히 알 수 있는 그리움이었다. 그는 눈을 감고 여진을 떠올린다. ‘검사님-!’ 활기찬 목소리로 저를 부르며 앞서 나가는 여진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지금 당장 그녀를 안고 그 체온을 느낄 수 있다면. 시목은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잠복을 나갔던 여진이 서에 들어오자 익숙한 뒷모습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려면 앉아서나 기다리던가. 그녀에겐 늘 애틋한 사람이었지만 며칠을 생이별한 후 상봉한 지금 저 굽은 등이 유난히 눈에 띈다. 여진은 내색하지 않고 시목의 등을 치며 밝게 인사했다.

 

“검사님? 웬일이에요?”

“오셨습니까. 이거 전해 드리려구요. 대기할 때 읽으시라고.”

“뭐야. 이 시간에 만화책 주러 왔다구요? 그냥 보고 싶었다고 말하면 되지. 어떻게 된 게 검사님은 결혼한 지 일 년이 다 돼도 변하는 게 없어.”

 

투덜댔지만 저를 보러 온 시목의 얼굴이 꼭 주인 잃은 강아지를 보는 것 같아 마음 한구석이 짠했다. 잠 못 자고 일한 건 난데 왜 저쪽이 더 핼쑥해져 있는지. 어서 사건을 마무리하고 이 강아지 같은 남자와 하루 종일 뒹굴고 싶은 생각만이 간절했다. 집에 돌아가면 날이 새도록 그를 안고 사랑한다 속삭여주리라. 잠깐의 만남은 지쳐 있던 그녀를 더 전투적으로 일하게 만들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의 진심이 누구보다 큰 위로와 응원으로 다가왔다. 마침내 범인을 잡아내고 퇴근이 결정되자, 여진은 곧바로 문자를 남겼다.

 

[나 퇴근해요. 오늘은 저녁 같이 먹어요.]

 

집에 들어서자 여진이 좋아하는 계란말이 냄새가 그녀를 반겼다. 편한 차림의 시목이 막 요리를 끝낸 듯 식탁에 음식들을 차리고 있었다. 지난 며칠간 사무치게 그리웠던 풍경을 보자 여진은 반가운 마음에 뒤에서 그를 와락 안았다.

 

“검사님. 나 많이 보고 싶었지?”

“네. 여진 씨 보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여진은 시목의 등에 기대고 있던 얼굴을 들고 다시 한 번 물었다.

 

“내가 방금 잘못 들은 거야? 검사님 방금 뭐라고 했어요?”

“제 아내 보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다고 했는데요.”

“검사님 못 본 사이에 왜 이렇게 변했어요”

“여진 씨가 저 사람 만든 거 모르셨습니까.”

“뭐야, 진짜. 검사님 어쩌다가 이렇게 능글맞아졌지?”

“언제는 결혼해도 변한 게 없다고 서운해하셨잖아요.”

 

여진은 팔을 풀고 소파로 가 누웠다. 곧이어 시목이 따라와 앉았고 여진은 자연스레 시목의 다리에 머리를 올렸다. 다정하게 머리카락을 넘기는 시목의 손길을 느끼며 여진은 얼굴을 부볐다. 따뜻한 손의 체온 때문인지 덩달아 여진의 얼굴까지 붉어지는 것 같았다.

 

“우리 오랜만에 봤는데 너무 미지근한 반응인 거 아닐까? 아직 불타는 신혼이잖아.”

“저녁 같이 먹자고 연락하셨잖아요.”

“난 이게 더 하고 싶었는데”

 

여진은 몸을 일으켜 시목에게 입을 맞추자 시목은 잠시 머뭇대며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다. 하지만 며칠 만에 만난 아내의 도발은 그에게 너무 큰 자극이었다. 시목은 이내 그녀의 얼굴을 감싸며 각도를 바꿔 더 깊게 들어왔다. 여진이 고개를 떼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 시목은 그녀의 볼에 입을 맞추고 목덜미를 훑으며 그녀를 기다렸다. 곧 다시 긴 키스가 이어졌고 여진이 그의 허리에 다리를 감쌌다. 시목은 기다렸다는 듯 그녀를 안아들고 침대로 향했다.

 

얼마나 오래 지났을까. 아무것도 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듯 온몸을 축 늘어뜨린 여진을 보며 시목이 나른하게 미소 지었다.

 

“그동안 고생 많았어요.”

“검사님도 고생 많았어요. 나 보고 싶은 거 참느라.”

“여진 씨는 저 안 보고 싶었습니까?”

“당연히 보고 싶었죠. 그래서 이렇게 열심히 일한 거 아냐. 근데 검사님, 나 배고프다.”

 

시목은 여진을 안고 식탁으로 돌아갔다. 국과 반찬들을 데워 상을 차리고 그녀가 첫 숟가락을 뜨는 걸 확인하고는 저도 식사를 시작했다.

 

“집에 오니까 좋네. 남편이 알아서 다 해주고.”

“내일도 원하는 거 있으면 다 말씀하세요.”

“나 고생하고 왔다고 이렇게 챙기는 거예요? 그럼 우리 내일 꽃구경 갈까?”

“꽃구경이요?”

“응. 요즘 벚꽃 만개해서 한창 예쁠 땐데. 난 봄만 되면 바빠서 갈 수가 없더라고. 근데 내일 우리 둘 다 쉬는 날이니까. 보러 가요. 응?”

시목은 어딘가 불만스러운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 내일 가는 거예요? 뭐 입어야 되지?”

 

 

여진의 말대로 벚꽃이 한창 만개한 도로는 절경이었다. 평소 입지 않는 하얀 원피스에 자켓을 걸친 여진과 그녀가 골라준 셔츠에 슬랙스를 매치한 시목은 누가 봐도 잘 어울리는 봄날의 커플이었다. 둘은 손을 잡고 걸으며 퍼드러진 꽃을 구경했다. 발길이 닿는 곳마다 물씬한 봄 내음이 그들을 감싸 안았다.

 

“여진 씨 여기 서 보세요. 찍어 드릴게요.”

“계속 내 사진만 찍었잖아. 그러지 말고 우리 같이 찍어요.”

 

여진은 행인에게 카메라를 건네며 부탁했고 가장 탐스럽게 꽃이 핀 나무 아래 둘은 손을 잡고 섰다.

 

'자 찍습니다! 하나 둘 셋!'

 

찰칵 소리가 나기 전 여진은 시목의 볼에 입을 맞췄고 그로 인해 웃는 시목의 모습까지 사진에 고스란히 담겼다. 잠시 벤치에 앉아 사진을 확인하던 여진은 검사님 표정 좀 보라며 깔깔대며 웃었다. 그때 바람이 일렁여 꽃잎이 여진 아래로 흩날렸고 그 바람에 여진이 고개를 들었다. 둘의 눈이 마주치고, 저를 뻔히 바라보는 시목에 여진은 예쁘게 웃었다.

 

시목은 언젠가 들었던, 사랑이 보이는 순간이 찾아온다는 이야기가 불현듯 떠올랐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일 것이라 확신했다. 벅차오르는 행복감. 여진이 아니었더라면, 평생 경험하지 못했을 기분이었다.

 

“뭘 그렇게 빤히 봐요. 내 얼굴 닳겠어.”

"예뻐서요.”

"검사님 어제부터 자꾸 왜 이래요. 나 적응이 안 돼.”

"자기 아내한테 예쁘다고 하는 게 이상한 일입니까?“

“아니. 검사님 캐릭터랑 안 맞잖아.”

“여진 씨가 저 사람 만들었다고 했잖아요.”

“언제는 사람 아니었던 것처럼 말하네. 뭐, 그리고 내가 한 게 뭐가 있다구.”

 

의기소침한 표정을 짓는 여진을 보고 시목은 그녀의 눈을 보며 말했다.

 

“가볍게 말하는 게 아니라, 난 진심이에요. 나한테는 누군가와 함께하는 일상이 허락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이렇게 함께잖아요. 가끔은 여진 씨가 내 저주를 푼 왕자님처럼 느껴집니다. 나하고 결혼해줘서 고맙고 일 년 동안 늘 함께해줘서 또 고마워요. 난 여진 씨한테 받기만 하는 것 같아서 표현이라도 더 하려고 노력하는 거예요.”

"검사님. 잠깐만 스톱, 스톱. 혹시 우리 오늘 ..결혼기념일이야?"

"역시 모르셨습니까.“

"아니 내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는데, 요 며칠 바쁜 바람에 매일이 무슨 요일인지도 모른 채로 살았어. 진짜 미안해요."

"괜찮습니다."

 

이제야 어제 시목의 불퉁한 표정이 이해되는 여진이었다. 뭐든지 다 해주겠다고 한 게 그래서였어. 당장이라도 제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심정이었다. 여진은 그렇지 않아도 큰 눈을 더 동그랗게 뜨고 한껏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연거푸 사과했고 시목은 그런 여진이 사랑스럽다는 듯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결혼기념일 기억 못 하는 아내라도, 사랑해요. "

“나도 사랑해요. 그리고 나도 검사님한테 받은 거 많아요. 내가 검사님한테 얼마나 의지하는데. 검사님 없으면 난 죽어. 그러니까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시목은 여진에게 가볍게 입 맞췄다.

 

"기분이다. 내가 잘못한 게 있으니까 오늘 저녁은 검사님이 제일 먹고 싶은 걸로 먹자!"

"괜찮겠습니까?"

"뭔데요? 설마 결혼기념일에 국밥집 가자는 건 아니겠지?"

"..."

"아 알겠어! 가자 검사님! 국밥집으로!"

 

여진은 시목의 손을 잡고 끌었고 잠시 멈춰 선 시목이 잡은 손을 깍지로 바꿔 꼈다. 그리곤 마주 보고 따뜻하게 웃으며 다시 길을 나섰다. 그 순간 둘은 확신했다. 앞으로 어떤 날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함께이기에 겁내지 않고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지금처럼, 언제까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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