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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두

원샷 @1RoHshot

01

 

한기가 뒤늦게 발악하던 어느 봄 날 황시목이 돌아왔다. 측근에 있는 지인 몇 명과 협소한 인사만 나누고 남해로 떠났던 일 년 전 그 때처럼 이번도 소리없는 복직이었다. 해안도로를 지나 고속국도를 건너 장장 네시간의 운전 끝에 도시 가장 안쪽으로 진입한 시목의 차량이 드디어 육지의 바람을 맞는다. 벌어진 차창 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화풍은 굳어있던 그의 머리칼을 건드렸다. 솔바람에 이리저리 부대끼는 머리카락 곡선을 따라서 그의 입꼬리도 살랑살랑 흔들린다. 기분 좋은 미소의 재개. 빨간불의 신호가 떨어질 때마다 시목의 손가락이 핸들 위에서 느릿느릿 고양이 같은 춤을 춘다. 톡, 토도독, 토독, 톡 톡. 마디 끝에서 전율되는 파동. 살을 타고 구석구석 퍼지는 간지러운 울림. 가슴에 닿으면 파도로 변질되는 무한한 떨림.

 

 

방지턱이 높아서 몸이 떨리는거라고

입술이 말라서 목이 타는 것뿐이라고.

 

 

도톰한 귓볼이 선홍빛으로 물들어가니

어느새 그의 얼굴에도 봄이 익어간다.

 

 

*

 

구김살 없는 코트에 반듯한 정장을 갖춰 입은 남자와 사이즈가 안 맞는 삼선 슬리퍼에 대충 발가락을 욱여넣은 여자가 자동차 콘솔박스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앉아있다. 이제 이 두 사람은 결혼을 할 것이다.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흔한 종이 서류의 순환 방식을 통해 혼인 할 예정이다. 일생일대의 중요한 거래를 앞두고 두 사람은 목소리를 잃은 듯 잠시 침묵한다. 남자는 본래 말이 없는 성질이라 그렇고 여자는 기상과 동시에 유부(有夫) 타이틀을 얻게되어 이렇다. 마른 하늘에 품절이라니. 세수도 안했는데 결혼이라니.

 

 

- 예쁩니다

- 죽는다 진짜

- 진심인데요

- 아니 세상에 어떤 신부가 쓰레빠 끌고 혼인신고하러 오냐고요

- 그래서 경감님이 유일무이한 사람이라는 생각은 왜 안하십니까

- 자기만 쫙 빼입고 오고... 나 이거 티셔츠 목도 다 늘어났는데

- 귀여우니까 괜찮습니다

- 그 입 안 다물어요?

 

 

매서운 경고에 시목이가 입술을 합죽이처럼 오무린다. 아랫입술을 윗입술로 물어 안으로 꾹 말아넣고 힐끔힐끔 눈치를 살피는 그 표정을 보고있자니 새삼 또 그게 말도 안되게 귀여운 것이라, 여진은 꿈틀거리는 하관 근육을 애써 손으로 가리면서 화가 머리 끝까지 뻗친 사람마냥 한숨을 푸우 뱉었다. 포커페이스의 농도가 짙어질수록 시목의 눈동자는 점점 더 크게 진동한다. 미친 그 모습마저 귀엽냐 왜. 이젠 입이 아닌 콧구멍을 막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괜히 인중을 문질러보는 여진이었다.

 

 

사실 프로포즈는 기해년의 첫 태양이 떠오를 때 남해 바다 앞에서 진작 받고 올라왔다. 벌써 한 달전의 일이다. 분위기에 휩쓸린 고백은 아니었지만 반짝거리는 은모래 조명과 미광이 내려앉은 바닷물결이 그들의 감정을 전혀 부추기지 않았다고 할 순 없겠다. 여하튼간 반지를 나눠끼고 하늘을 다 만질듯이 허공에 손을 쫙 펼쳐보기도 했으니 연인의 구애가 아쉬워 이러는 것은 단연코 아니었다.

 

 

다만 여진은, 이른 아침부터 연락도 없이 서울로 복직한 연인의 행동력과 그 와중에 혼인신고시 요구되는 준비물을 비롯한 각종 주의사항을 전부 숙지하고 올라온 실천력에 혀를 내두르는건 둘째치고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나왔다가 그대로 픽업당해버린 제 차림새가 못났을 뿐. 한여진, 너 이제 하다하다 잠옷입고 혼인신고도 하니. 참나.

 

 

-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릴게 있는데

-

- 제가 당분간 갈 곳이 없습니다.

- ... 엥?

- 그래서 말인데 경감님 집 앞마당 평상. 그거 저한테 내주시죠.

- ???

 

 

공중으로 흩어진 여진의 실소가 채 마르기도 전 터져나온 폭탄발언. 전세 계약 만료 기간까지 한달하고 보름이나 더 남아서 공덕동 아파트로 들어갈 수 없다는게 그가 처한 상황이었다. 아니 그럼 좀만 더 있다오지.. 하며 마음에도 없는 볼멘소릴 툴툴대니 맞은편에서 담백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기엔 경감님이 너무 보고 싶었습니다.

 

 

- 혹시 제가 너무 빨리 와서 실망하셨습니까.

- 아니 뭐... 실망이라기보단...,

- 싫으신겁니까? 내가 와서.

- 아이 싫기는요, 나도 물론 좋죠, 좋은데에...!

- 됐습니다 그럼.

-

- 캐리어 갖고 오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시목은 다시 가파른 계단을 내려간다. 그의 구두소리가 귓가에서 점차 멀어질 때 쯤 문득 그녀는 아수라장과 맞먹는 옥탑방 내부 사정을 떠올리곤 재빠르게 집 안으로 튀어들어갔다. 불편하게 발 볼을 조이고 있던 슬리퍼를 현관에 아무렇게나 벗어던지면서 다급하게 마루 위로 올라온 여진. 우선 바닥 위를 점령하고 있는 옷가지부터 한 움큼 집어든다. 후드나 자켓 처럼 부피가 큰 것들은 세탁기 안으로, 속옷과 양말은 이불 밑으로. 지금 이 순간 양 발은 마른 걸레가 되어 바닥을 싹싹 쓸고 손은 물건들을 감추느라 분주히 움직이며 시선은 창 밖을 주시한다. 비록 볼 꼴 못볼 꼴 다 보여준 황검사라지만 그래도 개미 콩팥 만큼 남아있는 지극히 사적인 것들까지 보여주고 싶진 않은 조급한 마음이 이뤄낸 환상적인 멀티 태스킹.

 

 

속성으로 청소(물건 은신)를 끝내고 철문을 열자 쥐색 캐리어를 도로록 끌며 이 쪽으로 오고있는 시목이 보인다. 나이스 타이밍, 미션 석세스! 여진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우당탕탕 좁은 집 안을 이리저리 뛰다니며 다급하게 방정리 하는 모습을 보곤 모른척 계단 밖에서 한참을 서성이다 온 시목의 배려는 꿈에도 모른채.

 

 

*

 

여전히 정장을 입고 있는 남자와 곰돌이 수면바지를 입은 여자가 접이식 밥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있다. 이제 이 둘의 관계는 부부다. 그들이 앉아있는 열 몇 평 남짓한 옥탑방은 아파트 임대 계약이 만료될 때까지 당분간 신혼집이 된다. 도도하게 팔짱을 끼고 저를 빤히 보는 여진의 태도에 무구한 표정으로 답한 시목은 금새 여진의 얼굴 뒤로 보이는 침대에 눈길이 빼앗긴다. 이불보가 남산처럼 불룩했다. 저 안엔 무얼 숨겨놓으셨을까. 물어보려다가 다시 입술을 꾹 깨문다. 왠지... 물어보면 안 될 것만 같은 민망한 예감.

 

 

- 꼼꼼히 읽고 사인해요

- 이게 뭡니까

- 한여진 설명서.

 

 

그 사이 검은색 볼펜으로 종이 위에 뭐라뭐라 필기하던 여진은 그것을 꼭 반으로 접어 시목 앞에 내밀었다. 가장 상단에 '한여진 설명서' 라고 쓴 글씨가 퍽 둥글둥글해서 시목은 괜히 모난데 없는 그 글자를 손으로 쓸어만졌다. 그리고 아래의 내용은 대충 이러했다.

 

 

1. 쉬는 날 억지로 잠을 깨우지 말 것

2. 억지로 밥을 먹이지 말 것

3. 소중한 아가들과의 시간을 방해하지 말 것

 

 

아가들이 누굽니까? 하고 시목이 묻자 여진은 곁에 세워진 책장을 떠받들듯 가리켰다. 여깄잖아요, 내 아가들. 선반 꼭대기까지 쌓아올려진 만화책과 피규어가 설명서에 적힌 '아가들' 이었음을 깨달은 시목의 눈썹이 순간 움찔 떨린다. 고체 상품 주제에 아가라는 별칭을 얻다니. 그가 다시 시선을 옮기면서 입을 연다.

 

 

- 저 아가들과는 얼마동안 놀 예정인데요?

- 원랜 하는 일 없으면 늘 끼고 있었어요

- 그렇지만 이젠 경감님 곁에 제가 있는데요

- 검사님두 취미란게 있을 거 아냐

- 그런거 없습니다.

 

 

여진의 눈동자가 뗴굴떼굴 구르다가 어떤 생각의 종착지에 닿으면 웃음을 와르르 쏟아내는 것이었다. 검사님 설마 질투해? 천하의 황시목이 취미생활을 질투하다니! 이거 완전 뉴스 1면 헤드라인 급 아녜요? 싱글벙글 신난 여진과 다르게 입술을 삐죽이고 있던 시목에게선 퉁명스러운 말이 뭉개져 나왔다. 아닌데요.

 

 

결국 4. 질투 금지 조항까지 적고 나서야 여진은 시목에게 펜을 건넸다.

 

 

- 검사님은 이런거 안써요?

- 네. 저는 그냥 경감님 원하시는대로 맞춰가겠습니다.

- .... .

- 경감님 마음껏 사용하세요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다 식은 커피잔에 입김을 불며 여진을 보았다. 이런 대답은 생각치도 못했다는 듯 만면에 당혹감이 퍼지고 있는 얼굴은 긍정의 반응일까 부정의 태도일까. 시목은 잠시 고민하다가 긍정의 반응으로 보는 쪽을 선택했다. 만일 이 자리에 서동재가 있었더라면 그는 입꼬리를 야비하게 늘어트린채 "야야, 방금 그 멘트 완-전 좋았어. 봐바 저 여자 지금 당황스러워서 한 마디도 못하고 뒤통수만 긁적이는거. 이 자식, 선방했다." 하고 야단을 떨었을 것이다.

 

 

*

 

- 짐은 어디에 풀면 됩니까?

- 평상 내어달라면서요. 그럼 평상에 푸셔야죠.

- 이따 저녁에 눈도 많이 온다는데요.

- 우와 정말요? 그럼 이불도 따로 필요없고 좋네!

- .... .

 

 

짓궂은 장난이 이어졌다. 시목은 이런 류의 농담엔 늘 속수무책이었다. 예전부터 그랬다. 말 한마디 헛투루 넘기는 법이 없던 시목은 곧잘 여진의 진지한 개그에 웃지도 못하고 당하기 일쑤였다. 특히 그녀가 음성을 낮게 깔고 무심한 척 표정연기까지 한 술 얹을 때면 더더욱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이불도 따로 필요없고 좋네! 하며 여진이 홍홍 웃자 시목의 광대가 시무룩하게 내려앉는다. 이러다가 정말 신고식 한 번 제대로 치루겠다 싶은 그 때. 불쑥 희고 기다란 손바닥 하나가 그의 턱 밑으로 쭉 뻗어졌다.

 

 

- 아, 가는게 있으면 오는 것도 있어야죠 사회생활 하루이틀 하셨남.

- 지금 대놓고 저한테 뇌물을 바라시는...

- ... 게 아니라! 계약금으로 정정하시죠.

-

- 아님 뭐 방세라고 생각하시던지.

 

 

상하로 팔랑팔랑 흔들리는 손가락이 시목을 재촉했다. 시목은 옅은 숨소리로 끄응 앓더니 이내 가슴 안쪽 주머니에 손을 넣고 뒤적이기 시작했다. 손이 주머니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생각의 꼬리가 꼬리를 물고 여진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뭐야 저 사람 설마 진짜 지갑이라도 꺼내려는건 아니겠지. 아냐 황검사라면 충분히 그럴수도.

 

 

거, 검사님 장난인데!

라는 싱거운 말이 여진의 입에서 터져나오는 동시에 꼭 그라쥔 시목의 주먹도 밥상 위로 올려졌다. 그가 손을 펼치자 식탁보 위로 봉지 끝이 뾰족한 사탕 두 알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 가운데에 '자두' 라고 쓰인 글자가 부드럽고 무해한 생김새로 주름이 자글자글하게 웃고있었다. 사탕을 발견한 여진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 합격!

 

 

*

 

여진은 봉지의 모서리를 쭉 찢어 한 입에 쏙 넣곤 혀를 굴렸다. 적당히 새콤하고 적당히 달달한 자두의 맛이 입 속으로 구석구석 퍼져나갔다. 어릴 때부터 그녀가 아주 좋아하던 '최애' 사탕이었다. 가족들과 밥을 먹고 나오면 나무끈으로 촘촘하게 옭아맨 바구니 안에 고사리 손을 집어넣고 자두알 사탕만 골라내던 때도 있었다. 아버지가 밤 늦게 일을 마치고 돌아오실 적이면 다른 형제들은 모르게 여진이 머리맡에만 슬쩍 놓고 간 것이기도 했다. 창문을 때리는 바람소리에 늦게까지 잠을 설치던 다섯살의 여진이는 아버지가 사탕 봉다리를 쥐어주러 다가올 때마다 아주 열심히 자는 척을 했더란다.

 

 

아버지의 품 냄새가 섞인 사탕을 깨물어 먹다보면 언젠간 자두사탕이 내 안에서 커다란 오얏나무를 키워갈지도 모를거란 생각을 했다. 곧고 튼튼한 나뭇가지 사이로 매달린 자두는 한 여름의 뜨거운 뙤약볕을 맞으며 무럭무럭 자란다. 칠월이 되면 그것은 태양빛을 잔뜩 머금고 완연한 열매가 된다. 처음 열린건 아버지에게, 그 다음껀 엄마에게 주고 마지막 자두는 소매로 반질반질 문질러 여진의 입 속으로 와앙!

 

 

이렇게 열매를 먹고나면 내년 봄에도 또 다시 나무를 만날 수 있겠지. 두번째로 자란 나무에 맺힌 자두는 주변 사람들에게 하나씩 나눠주는 것이다. 행복감이나 편안함 같은 마음은 너무 추상적이고 관념적이라 손으로 만질 수가 없어서 자두 안에 꼭꼭 눌러 담아 선물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덧 여진의 가슴 속에 서른 번째 나무가 피어났을 때

그녀는 메마른 사막과도 같은 그를 만나버린 것이다.

 

 

*

 

족히 삼 주만의 해방이었다. 부모들의 밤잠을 설치게 한 아동 성추행범이 오늘 오후, 학교 인근 공터에서 체포되면서 용산서 강력계 형사들의 철야도 끝이 났다. 조사팀 몇 명을 제외한 나머지 형사들의 퇴근 준비가 한창인 가운데 홀로 뚱하게 앉아있던 김경사는 조용히 치약을 주욱 짜내면서 물끄러미 맞은편 자리를 보았다. 허겁지겁 가방 안에 짐을 쏟아내듯 담고있는 여진이 거기 있었다.

 

 

- 뭐 급한 일 있어요? 아주 그냥 정신 없어보이네?

- 그러는 김경사야말로 정신 없어보이시네. 거기 치약이나 빨리 닦아요, 바닥에 다 떨어졌어.

- 아이 진짜 드릅게.. 이를 닦아야지 왜 공공재에 흠집을 내고 그래요 세금이 이게,이게 얼만데!

 

 

우연히 그 곁을 지나가던 장 건이 "세금 존귀 라는 말도 몰라요? 국민들의 세금은 존나게 귀하다!" 하면서 짧게 혀를 찼다. 김경사는 멋쩍은 얼굴로 툭 떨어져버린 연녹색의 치약 덩어리를 휴지로 훔쳤다. 먼저 시비 걸어놓고 되려 지적질 당하는게 민망하다는건 아는 모양인지 그의 얼굴색이 조금 붉어져있었다. 건은 계속해서 존귀! 존귀! 하며 깐죽댔고 여진은 그쯤에서 이만 대화를 끊었다. 어깨 안마봉으로 건의 상체를 후드리 치며 그를 물린 김경사의 눈이 또 다시 도로록 여진을 향해 굴러갔다.

 

 

- 아 뭐! 할 말 있음 하던가! 기분 나쁘게 왜 빤히 쳐다만본대?!

- 아니이, 뭔가 이상하니까는.

- 뭐가요

- 퇴근을 다 하시니까.

 

 

생뚱맞은 답변을 내논 김경사가 뒤통수를 긁적인다. 제가 생각해도 방금 뱉은 말은 꽤 설명이 필요한 문장이었다. 형사는 밥 안먹고 똥 안싸고 하루종일 범인만 잡느냐, 우리도 다 똑같은 대한민국 직장인이다 라며 허구헌날 동료들 귓구멍에 딱지가 앉도록 말했던 사람이 바로 저 자신이었는데 이제와서 뜬끔없이 '퇴근을 하시니까 이상하다' 라니.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퇴근하고 싶은 것이 그가 말하는 대한민국 직장인 아니던가.

 

 

각자의 자리에서 잔업을 마무리 하던 강력반 경찰들의 시선이 김경사에게로 쏠리자 그는 허둥지둥 다시 입을 열었다.

 

 

- 원래는 맨날 마지막까지 남아서 막 밥도 먹고! 집 가기 싫다고 여기서 씻고! 그러셨잖아요!

 

 

그랬다.

 

정말 그랬다. 그의 말대로 여진은 이번 사건이 있기 전까진 이 곳 용산서를 제 집 안방이라도 되는 양 낮밤 구별없이 아주 자유롭게 활보하고 다녔다. 끼니 해결과 세안은 물론이고 간단한 수건들은 뚝딱뚝딱 물빨래 해서 건조대에 널어 그걸 꼭 가습기 삼아 촉촉하게 잠이 든 날도 많았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체 찌그러져 졸고 있을 때면 어김없이 곁에서 잔소리가 들려왔다.

 

 

'경위님, 아 아니 경감님. 집에 가서 좀 씻고와요, 예? 데려다줄게. 여기서 자면 입 돌아가.'

껌칼로 바닥에 누룬 껌을 밀어내듯 자연스러운 이 말투는 장형사.

 

 

'저... 경감님. 댁으로 돌아가셔서 편하게 옷도 갈아입으시구 발도 닦고.. 어쩌구 저쩌구...'

이렇게 말이 길고 지루한건 신입 순창.

 

 

'야. 집 없냐?'

마지막으로 아주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쏘아보는 사람은 팀장 전대수였다.

 

 

김경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번엔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여진에게로 향한다. 여진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서 몇 십 개의 눈알들을 마주했다. 저 눈 한 쌍당 들어있는 수백가지 호기심들을 어떻게 다 달래야 하나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슬금슬금 가방을 어깨에 걸쳐 매기 시작했다. 잠시 사람들의 집중이 분산되자 여진은 때를 놓치지 않고 뒷문으로 도주했다. 성공이었다.

 

 

- 나 먼저 갑니다! 아무나 내 책상에 노트북 좀 꺼주고 가요!

 

 

그러면서 점이 되어 유유히 용산서를 빠져나갔다. 여진이 사라지고 남은 빈 공간에 묵직한 침묵이 들어서면서 다섯 개의 머리통이 다시 한번 뭉쳐졌다. 한여진이가 퇴근을 가장 먼저 했다, 그렇다면 집에 중요한 뭔가를 두고 왔다는건데..., 한여진이를 집으로 끌어당기고 있는 이 수상하고 소중한 존재가 과연 뭘까..., 쟤 뭐 좋아하니. 경감님 피규어에 환장하는데 애들 만화책이랑. 야 그건 예전에도 좋아했던거잖아. 아아.

 

 

- 한여진 설마...

 

 

전대수의 외침에 모두가 그를 따라 고개를 번쩍 위로 처올렸다. 사뭇 비장한 분위기가 그들 사이로 맴돌았다. 그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킴으로써 긴장감을 한 템포 업 시키더니 이윽고 천천히 말을 이었다.

 

 

- 고양이 키우는거 아니야?!

- ....

- 길고양이 함부로 주우면 안되는데 한여진이 속이 여려가지고...,

 

 

아 여기서 고양이가 왜 나와요 팀장님도 참. 가만 보면 진짜 사람 종 잡을 수가 없어.

장 건이 툴툴대며 먼저 무리를 이탈했다. 나머지 사람들도 건과 크게 다른 반응은 아니었다. 싱겁기 짝 없는 유추에 모두가 전대수를 외면하고 돌아섰다. "각자 할 일들 합시다! 갈 사람은 빨랑 짐 싸서 가시고, 아닌 사람은 조사실로 오시고." 건이 서류철 파일 끄트머리로 뒤통수를 긁적이다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아 맞다 경감님이 노트북 좀 꺼달랬는데.

 

 

여진의 노트북과는 영 좋은 추억이랄게 없는지라, 또 그래서 제 것이 아닌데도 사용법이 제법 능숙했다. 건은 무리 없이 배터리 코드선을 뽑아내고 전원 버튼을 눌러 노트북을 잠재웠다. 얼마 후 노트북이 완전히 가동을 멈추자 그가 조심스레 화면을 닫았다. 그러자 드디어 여진의 빠른 귀가에 대한 이유를 알 수 있는 정답지가 노트북 너머로 모습을 드러냈다. 상아색의 빳빳한 종이 봉투에 용 한 쌍이 수 놓아진 청첩장의 형태로 말이다.

 

 

 

 

02

 

담장 너머로 흘러나온 고소하고 맛있는 냄새들이 골목을 가득 채웠다. 여진은 그 사이를 걷고있었다. 이집 저집에서 조리고 끓이는 음식 냄새가 한데 뒤엉켜 뭐라 설명하기 힘든 메뉴가 만들어졌다. 이건 무슨무슨 음식이다, 라고 할 순 없지만, 아무튼간에 따뜻하고 정겹게 기름진 풍미였다. 그녀는 종종 그것을 '정' 이라고 불렀다. 그러면서 그들이 가진 정을 부러워했다. 혹은 그리워했고 타지로 흩어진 식구들을 떠올렸다. 그런 생각을 할 때면 마음이 허기져서 배가 고파지기도 했다. 서울살이에 무뎌지는 동안에도 그 공복만큼은 차마 익숙해지지 못했다. 앞으로도 익숙해지지 못할거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시목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경감님 [오후 8:10]

경감님 이러는게 어딨습니까 [오후 8:10]

경감님 진짜 실망이다 [오후 8:11]

어떻게 나한텐 한마디 말도 없이 결혼을 ...

 

 

실시간으로 폭주하는 알림창을 물끄러미 보고있던 여진의 입매가 올라간다. 장형사가 벌써 청첩장을 찾아낸 모양이다. 여진은 그저 웃는것으로 대신 답하고 휴대폰을 주머니 속에 푹 찔러 넣으며 걸음을 계속했다. 그렇게 한 중턱 쯤 왔을까. 고개를 들자 어느새 노란 불빛이 환하게 켜진 옥탑방이 보인다. 그리고 그 앞에 앞치마를 맨 황검사가 주위를 두리번 거리는 모습도 시야에 겹쳐 들어왔다. 시목을 먼저 발견한 여진이 손을 번쩍 들어 좌우로 팔을 흔들었다. 곧이어 방황하던 시목의 시선이 멈췄다.

 

 

- 경감니임!

 

 

두 손을 동그랗게 모아 입 주변에 갖다대면서 그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 계단이이! 미끄럽습니다아!

-

- 올라오실때 조심하시라구요!

- 알았어요오!

 

 

그러면서 여진은 해맑게 엄지와 검지를 붙여 조그만한 하트를 날렸다. 난데없이 옥상 아래서 하트를 받은 시목은 잠시 허둥대더니 한 쪽 손에 들려있던 국자를 휘적휘적 흔들어 보이는 것으로 반응했다. 그 어설픈 모양새에 여진의 웃음보가 또 한번 왈칵 터졌다.

 

 

*

 

으으 춥다 추워.

발바닥에 불이 난 토끼처럼 깡총깡총 문을 밀며 들어온 여진이 한 쪽 다리를 들고 로퍼를 벗어던졌다. 시목은 그 앞에서 찬 바람이 잔뜩 묻은 외투를 벗겨주다가 슬쩍 고갤 돌려 어깨 너머로 현관을 보았다. 여진의 가죽로퍼가 공터의 흙바람과 간 밤에 내린 눈의 흔적들로 여기저기 성치 않은 몰골을 하고 있었다. 오늘은 별 일 없으셨습니까? 여전히 시선을 아래에 둔 채 그가 물었다.

 

 

- ....

- 경감님?

- 어, 엉? 예? 머라공용(뭐라구요)?

 

 

가스 불 위에서 팔팔 끓고 있는 찌개의 국물을 숟가락으로 퍼먹던 여진의 동작이 정지됐다. 머라공용? 같은 얼빠진 말을 버벅이면서 입 속에 숟가락 머리를 반 쯤 물고 있는 모습에 시목이 눈을 땡그랗게 뜨고 아주 여러번 깜빡였다. 처음 보는 낯선 표정에 당황한 여진은 멋쩍게 입맛을 다시며 물고있던 숟가락과 함께 변명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 아니 내가 너무 배가 고파가지고 손 씻을 생각도 못하고 달려들어버렸넹..

-

- 미안. 아니면 혹시 숟가락 섞어먹는거 싫어해서 그래요? 내가 다시...,

- 그게 아니라

 

 

시목이 말꼬리를 늘렸다.

여진은 침을 꿀꺽 삼켰다.

 

 

- 그 숟가락 아까 바닥에 떨어져있던거 올려논건데

- .. 아이 뭐야 난 또 뭐라고. 괜찮아 괜찮아 안 죽어

- 청소하다가 소파 밑에서 발견한건데도요?

- .... 우엑.

 

 

어쩐지 입 안에 가시가 돋는 느낌이 든다 했네. 여진이 등을 돌려 물로 가글을 하는 동안 시목은 냉장고 안에 넣어놨던 반찬들을 꺼내 차례차례 접시에 덜어담기 시작했다. 미역줄기, 고사리 볶음, 콩나물 무침, 연근 조림 같은 나물 반찬들로 순식간에 풍성해지는 식탁. 가운데 자리에 깔판까지 깔고나면 식사준비는 그것으로 간결하게 끝.

 

 

- 잘 먹겠습니다

 

 

소매로 냄비를 운반해온 여진이 방석 위에 털썩 주저앉으며 손을 모았다. 시목도 그녀를 따라 손을 살짝 모았다가 금방 떨어트린다. 모락모락 따뜻한 밥알에서 난 김이 저마다의 입 속에 들어가 한 웅큼씩 뭉게구름을 피워냈다. 입술을 오무리고 벌리며 뜨거운 숨을 죽일수록 구름의 부피도 점점 줄어들었다.

 

 

- 근데요 그 앞치마는 어디서 났어요?

 

 

찌개 속에 들어있던 말캉한 두부를 건져내던 시목. 여진의 물음에 고개를 살짝 숙여 제가 맨 앞치마를 본다. 개나리를 연상케하는 노란색 바탕에 찐득한 초콜렛 성으로 용감무쌍히 돌진하는 캐릭터 그림이 가슴에 그려져 있었다. 하단에는 붉은색으로 칠해진 영어문구가 굉장히 멋진 필체로 이렇게 적혀있었는데,

 

 

「 Kellogg's 」

 

 

그 이름이 왠지 모르게 익숙해서 더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 켈로그?

- 아까 마트에서 경감님이 좋아하는 시리얼 사고 받은 사은품입니다.

 

 

저거요.

하면서 그가 수납장을 가리켰다. 수납장 맨 윗칸에 초코 시리얼 박스가 비스듬히 서서 저희들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저녁거리를 사러 마트에 장 보러 간 시목이 집어온 것으로, 마트 판매원은 그가 어린 자식을 둔 초보아빠인 줄 알고 챙겨준 사은품이었지만 그것은 서른다섯살의 편견 따위 없는 성인 남성의 몸 위로 둘러지게 되었다. 따지고 보면 당장 아이가 없을 뿐이지 언제라도 아빠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마트 판매원의 눈치가 완전히 틀린 것만은 아니라고, 시목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더란다.

 

 

 

03

 

- 경감님. 밖에 수건 있습니까?

 

 

물기를 머금은 시목의 음성이 축축하게 울려퍼진다. 수건의 부재로 인해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옹골찬 물방울들이 티셔츠의 목덜미를 적시고 있었다. 시목은 등허리를 숙인 채 어기적 어기적 걸어서 욕실 문만 빼꼼 밀고는 경감님...., 하며 여진을 찾지만 거실에서는 티비 속 패널들의 실 없는 농담소리만이 작게 웅성일 뿐. 당차게 웃거나 후다닥 제 쪽으로 달려오는 발자국 소리 따위는 없었다.

 

 

- 한경감님

 

 

혹시나 텔레비전 음량에 제 목소리가 먹혔을까봐 시목은 한번 더 여진을 불러보기로한다.

 

 

- 여..., 어...

- 한여진씨.

 

 

이번엔 조금 다른 호칭을 사용해본다. 결혼 후 호칭정리에 대해 어떻게 할 건지 얘기 나눴던 간밤의 대화가 문득 떠오른 까닭이다.

 

 

하지만 역시나 여진은 답이 없다. 결국 시목은 빨랫감에 넣으려던 티셔츠 한 장을 꺼내 그것으로 대충 물자국을 찍어내고 밖으로 나오는 수를 택했다. 욕실 불을 끄고 방 안으로 조금 더 깊숙히 걸어들어오는 시목의 눈 앞에 보다 만 만화책과 조립하다 만 장난감의 흔적이 나타난다. 그러나 정작 찾는 이는 동굴 같은 이불더미만 남긴 채 사라져버린 기이한 광경. 순간적으로 시목의 눈치가 빠르게 굴러간다. 어쩔 수 없다. 일종의 직업병 같은거다.

 

 

사각지대도 없는 집 안을 열심히 둘러보던 시목은 이윽고 작은 창 밖으로 타겟을 돌려본다. 집 밖으로 나가셨나. 그러고보니 이 옥탑방을 계약한 첫번째 이유가 넓은 마당 때문이라고 말했던 적이 있었다. 물론 경제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몇십개의 계단을 지나야만 만날 수 있는 그 넓은 마당을 밟으면 꼭 보상받는 기분이 든다고.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더는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시목은 그대로 현관문을 밀었다.

 

 

 

04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어진 담배개비가 쌀쌀한 밤공기를 장작 삼아 더 붉게 익어가고 있었다. 이따금씩 저의 얇은 몸통을 툭 툭 튕겨내는 엄지손가락의 반항을 받으며 잿가루를 토해내는 것. 막대 끄트머리를 습관적으로 잘근히 씹다가 문득 숨을 빨아올리면 몸 속 깊숙한 곳까지 따라 들어오는 흐릿한 기체. 그렇게 마시고 뱉기를 두어번 반복하다 세 번째로 연기를 맞는 순간. 끼드득, 옥탑방의 문고리가 돌아갔다. 턱 끝에서 겨우 맴도는 짧은 머리카락이 고개의 회전 방향을 따라 붕긋하게 날았다가 차분히 뺨 주변으로 가라앉았다.

 

 

- 한참 찾았습니다

- 나를요?

- 네

- 왜, 혹시 도망이라도 갔을까봐서?

- ....

 

 

차마 아니라고는 말 못하고 그저 입술만 꾹 깨물어버리는 시목이었다. 여진은 그 유약한 표정을 재미나게 구경하더니 이내 피식 웃으면서 다시 담배를 고쳐 물었다. 그러는 사이 걸음을 옮겨 평상에 앉은 시목은 정면으로 고개를 들어올렸다. 맞은편에서 서울이 빛나고 있었다. 천지가 먹물로 범벅된 공간 속에서 서울이라는 도시만 화려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어느새 담배개비가 소임을 다한 영광스런 몰골로 탈색되자 여진은 그것을 바닥으로 떨궈 아주 조그맣게 남아있던 불씨마저 뭉개트렸다. 발 밑에서 짓이겨진 꽁초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여진. 잠시 뒤 느즈막히 입을 연다.

 

 

- 무서워서 그래요?

-

- 결혼하는거. 무서워요?

 

 

투명한 눈동자 속에 담긴 도시가 흔들린다. 시목은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지도 않고 바싹 타들어가는 목젖을 울컥이지도 않은 채 묵묵히 그 무섭다는 감정을 살가죽과 온 몸에 난 세포결로 느낄 뿐이었다. 무서움과 공포는 유의어지만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감정의 무게는 다른 것이라고, 미용실 한 쪽 구석에 꽂혀있던 교육 잡지의 모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무서운건 아주 단순해서 순간적으로 맞닥트리는 놀람 같은 것. 공포는 목이 죄여오는 것처럼 서서히 무언가가 나를 짓누르는듯한 압박감 이라고. 그래서 무서움과 공포가 지닌 무게는 다를 수 밖에 없다고. 발 끝에서부터 천천히 죽어가는 고통과 소리 지를 새도 없이 죽어버린 고통은 같을 수 없는 것.

 

 

하지만 지금 제가 느끼는 이 감정이 무서움이라면 그 작자의 말은 틀렸다. 무서움이 공포보다 무겁다. 공포보다 아득하고 공포보다 아찔하다. 아주, 아주 깊다. 아주 깊어서 영영 잠겨버릴 것만 같은 이 느낌, 이 감정이 무서움이라면 그 작자의 말은 완전히 틀렸다. 그는 결혼이 아니라 무서움을 느끼는 저 자신이 무서울 지경이었다.

 

 

- 짐이 될 것 같습니다.

 

 

오랜 침묵 끝에 물 떨어지듯 새어나온 진심을 여진이 모를리 없었다. 그가 무엇을 짐 이라고 일컫는지도 알 수 있었다. 여진은 신음을 진득하게 내쉬면서 그의 눈치를 힐끔 살폈다. 까만 동공 속에서 네온사인의 불빛들이 터진 폭죽처럼 가득 번져있었다. 빛의 파도가 일렁이는 눈동자를 한참 바라보던 여진이 고갤 돌리면서 불쑥 말을 던졌다.

 

 

- 꼭 붙어 있겠다고 했잖아요 내가.

-

- 곁에 아주 꼭, 붙어있겠다고.

 

 

말이 가진 힘은 위대했다. 시목의 가슴 중앙이 욱씬하게 파도치기 시작했으니까. 이상했다. 운전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자꾸만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자동차 바퀴가 방지턱을 넘지도 않았는데 무거운 돌덩이가 폭삭 가라앉은 것처럼 저릿했다. 여진의 뒤로 보이는 서울의 전경이 하나의 점처럼, 그러니까, 꼭 폭죽처럼 흐릿하고 넓게 번져있었다. 붉고 노랗고 파란색의 네온사인 불빛들이 마치 하늘에 짱 박힌 별들처럼 보여서 시목의 눈꼬리도 그들을 따라 붉게 물들어졌다.

 

 

- 검사님. 사람들이 왜 영화나 드라마 보면서 우는 줄 알아요?

-

- 그냥 내 생각이긴한데, 뭐 그렇다고 아예 근거없는 말은 아니지만.

- ...

- 감정은 쉽게 전이 되는 성질이라 그래요.

-

- 그런걸 보통 공감이라고 하거든요.

- 공감이요.

- 그러니까 검사님이 기쁘면 나도 기쁘고 검사님이 슬프면 나도 슬픈거요.

- 그래서 지금...

 

 

그가 여진의 뺨을 손가락으로 구부정하게 가리켰다. 검지의 손톱 끝이 찌르고 있는 뺨은 투명한 눈물로 어지럽게 범벅 되어 있었다. 어떻게든 웃어보려고 억지로 입가 주름을 늘리는 모습이 안타까울 정도로 아주 처연했다. 그 표정에 시목의 코 끝이 또 한 번 찡- 시려온다. 매서운 겨울 산바람을 맞은 것처럼 뼈마디 전부가 얼얼한 이 기분. 이 기분은 어떤 감정입니까.

 

 

- 경감님과 제가 공유하고 있는 이 감정이요.

 

 

당신이 멋대로 옮아가버린 이것.

 

조금 더 가까이 붙어 앉은 두 사람이 콧날과 콧날 사이의 빈 틈을 좁혀 간격을 맞물리면서 숨을 죽였다. 달뜬 호흡이 입에서 입술로, 폐에서 폐부로 천천히 스며들어왔다. 아무도 먼저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그저 깊숙한 통로 속에서 함께 입을 맞추고 오랫동안 마음을 쌓을 뿐이었다. 그렇게 아주 깊숙하고도 오래토록 쌓을 뿐이었다.

 

 

 

 

+04

 

 

- 건배!

 

 

어느새 눈물자국을 말끔히 지워내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금방 복귀한 여진이 캔 맥주를 꼴깍꼴깍 삼키면서 고개를 젖히고 눈을 감았다. 맥주의 탄산이 목구멍을 뚫을 듯 따갑게 톡톡 터졌다. 시목은 눈두덩이가 잔뜩 부은 채 어정쩡한 모양새로 캔 맥주를 들곤 여진을 바라보았다. 사람이 어쩜 저렇게 휙 휙 환기될까. 신기하고 어색했다. 분명 삼십분 전까지만 해도 저를 대신해 펑펑 울면서 손을 잡아주던 사람이 아니던가.

 

 

바로 옆에서 저를 노려보는 진득한 시선을 느끼지만 여진은 아랑곳 하지 않고 야경을 안주삼아 한 번 더 맥주를 꺾어 마셨다. 이야, 미세먼지 따뜻하고 좋네. 그런 말을 농담이랍시고 중얼거렸다. 물론 웃으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아, 진짜 아니라니까.

 

 

- 왜요. 할 말 있어요?

- 네

- 해요.

 

 

시목의 시선은 여전했다. 집요하게 한 곳만 응시하고 있는 눈빛. 그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여진이 알 리 없었다. 그녀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자 시목의 눈동자도 여진의 움직임을 따라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 감정은 전이 되는 거라고 하셨죠.

- 네.

 

 

그가 계속 말을 이었다.

 

 

- 제가 슬프면 경감님도 슬프고 제가 기쁘면 경감님도 기쁘고...

-

- 그럼 입 맞추고 싶으면요?

- ...

- 지금 입 맞추고 싶은 이 욕구도, 전이됐습니까?

 

 

그의 시선은 여전히 여전했다. 여전히 한 곳만을 집요하게 바라보는 눈빛.

 

그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여진은 이제는 모른 척 지나갈 수가 없는 것이다.

 

전이 되어버린 것이다.

 

꼼짝없이 그의 마른 가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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